태어나기 전 우리는 0이었다. 0에서 태어나는 순간 1이 된다. 이 1은 또 다른 1을 만나 2가 된다. 2는 자신들의 세포 복제 과정을 거쳐 비슷한 그러나 또 다른 숫자들을 만들어 낸다. 나는 이를 2+n으로 표시하고 싶다. 그런데 이 n들은 자기와 전혀 다른 n과 만나 또다시 2가 되고 조금 후에 또다시 2+n의 형태를 갖춘다. 계속되는 2의 세포 분열 속에서 세상이 유지되지만 n이 떨어져 나가면서 2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 2는 죽음, 이혼 등의 여러 가지의 이유로 1이 된다. 1이라는 숫자는 시각적으로도 외로워 보인다.
심리학적으로는 더 외로워 보인다. 그래서 그 1은 또 다른 1을 찾아 공허함을 메꾸려고 한다. 근본적으로 1은 혼자서 그 화려함의 행진을 멈추고 자신의 원래 모태였던 0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0은 없음이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가 하나 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의 내용과 같다. 노자의 道는 0인 것이다. 0은 만물의 근원이 되는 출발점이다. 0은 세상을 세상답게 해주는 조화의 원리이다.
만물은 ‘음’을 업고 ‘양’을 안아 ‘기’가 충만하여 조화를 이룬다(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음’은 1이며 ‘양’은 또 다른 1로써 ‘음과 양’은 서로 다른 각자이지만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붙어 다녀야 한다. 즉, ‘업고 안아’야 할 것이니 이 둘이 합하여 지면 생기(生氣)가 넘치고 조화를 이루게 된다. 사람 ‘인(人)’의 원리와 같다. 人의 글자에서 보다시피 이는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이다. 어느 하나가 내어준 어깨나 등을 거두어 버리는 순간 그 어느 하나는 무너져 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