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서 39년간 머물다가 이제 은퇴한 지 2년차이다. 자연인이 되고나니 그 동안 교육계에서 쌓아 놓았던 노하우를 활용할 곳이 마땅치 않다. 현직에 있을 때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우리 사회가 아니다. 봉사활동을 하려 해도 그냥은 안 된다. 내 시간과 노력, 경비가 들어간다. 퇴직한 선배들이 왜 등산을 즐기는지 그 이유를 알만도 하다. 일본에서는 은퇴자가 지역사회에 데뷔할 수 있도록 체제가 정비되어 있다는데 그들 사회가 부럽기만 하다.
은퇴 후 나의 궤적을 살펴보면 시행착오 점검과 함께 나아갈 방향이 설정된다. 취미활동으로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기타교실에 들어갔다. 초보교실에서 저녁 시간 두 시간 씩 약 3개월 정도 배웠는데 진도가 부진하다. 송년발표회에 동아리가 출연해 연주 실력을 뽐내기도 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를 생각하니 인내력과 노력 부족이다. 강사 역시 초보가 수시로 들어와 진도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음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입학. 1학년 관광학과에 입학하니 사람들은 묻는다. 자격증 취득하여 관광가이드 하려느냐? 2학년이나 3학년으로 편입하지 왜 1학년이냐? 이제 학사 학위 따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나의 방송대 입학은 취업이 목표가 아니다. 새로운 학문에 도전하려는 것이다. 방송대 조기 졸업이 목표가 아니다. 새로운 공부를 하면 제2의 인생, 뜻있게 세월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주민센터 탁구교실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남녀 수강생 20명의 평균 나이는 60세다. 70세 이상인 두 분은 탁구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어려운 공도 다 받고 날카로운 공격에 펼친다. 오히려 젊은이들이 쩔쩔 맨다. 여성이라고 남성보다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탁구 경력이 있어서인지 나 같은 탁구초보들은 그들에게 상대가 아니 된다. 3개월 간 복식게임으로 실력을 겨루니 어느 정도 서열이 매겨진다.
올해는 주민센터 마을만들기협의회 총무를 맡았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어떻게 하면 쾌적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 것인가를 연구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모였다. 10여 명 정도가 자진하여 모였는데 월 회비 2만원을 내고 정기 월례회의, 임시회의, 번개 모임 등을 하면서 마을 현장을 누빈다.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지역사회를 발로 뛰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몸담은 마을만들기협의회는 봉사 실천 모임이다.
은퇴 후 일거리, 취미생활, 친구, 재력, 건강 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배우자 아닐까 싶다. 나를 끝까지 지켜 줄 사람은 가족과 사랑하는 아내다. 아내를 대우하지 않고 홀대하다가 노년이 불행해진 사례는 매스컴을 통해 종종 보아 왔다. 젊어서부터 부부가 서로 존경하고 위해주면 문제는 해결된다. 부부가 취미생활을 함께 하면서 생각을 공유한 시간이 많았다면 노후가 행복할 것이다.
우리 부부, 성격은 다르지만 함께 교직에 있었기에 공통점도 많다. 광교산과 칠보산 등 인근 지역에 있는 산에 오르기, 일월저수지와 광교저수지 트래킹, 봄마다 떠나는 야생화 탐사, 벚꽃 나들이, 베란다에서 화초 가꾸기, 텃밭에서 농사짓기, 방학 때 떠나는 국내 가족여행, 누님과 함께 떠나는 맛집 여행, 자전거 타기, 배드민턴 치기 등을 즐기는 편이다. 이제 아내는 탁구 라켓을 선물로 사달라고 한다.
얼마 전 우리는 취미생활 하나를 추가하기로 했다. 바로 장기두기다. 브레인 TV에서 장기 대국을 보니 내가 아는 단순한 장기 수준이 아니다. 급수도 있고 한국, 중국, 일본에서 즐기고 있다. 국제대회도 있다. 실천이 중요하기에 장기판과 장기알을 사왔다. 우선 아내에게 장기 두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는 귀가해도 가사일로 바쁘기만 하다.
첫날, 밤 9시 뉴스 보는 것을 생략하고 장기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기물 이름, 행마법, 시작 전 기물들의 위치 등을 알려 주었다. 제한 시간이 있을 때 계산하는 기물들의 점수는 나도 처음 알았다. 병(兵)과 졸(卒)은 2점, 상(象)과 사(士)는 3점, 마(馬)는 5점, 포(包)는 7점, 차(車)는 13점이다. 그 다음 연습대국을 두었다. 아내의 태도를 보니 연신 하품이다. 장기 두는 것이 재미가 없는 것.
며칠 후 다시 장기판을 펼쳤다. 실력 차가 많이 날 경우에는 차·포, 마·상, 졸·병을 떼고 두는 것이 생각났다. 처음엔 차·포 2개를 떼고 두었는데 스승이 이겼다. 다음엔 차·포 4개를 떼고 두니 한 번 실수에 재기 불능이다. 당분간 아내와 나는 차(車) 둘, 포(包) 하나를 떼고 두면 될 것 같다. 이것이 부부추억을 만드는 한 방법이다. 대화를 하면서 유대가 강화된다. 장기도 바둑처럼 복기를 두면서 패인을 분석해야 실력이 는다고 한다. 아내와 맞장기를 두고 복기까지 할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