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사천대교가 멀리 보이는 연수원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림 같은 해안선 아래 질척한 갯벌과 그 사이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물줄기, 바다의 숨결 같은 둔덕이 물때를 맞추어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저는 바다와 눈을 맞추었습니다. 표정이 달라지는 바다를 시간차로 바라보고 있으면 지난 학기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잠자리가 다른지 일찍 깨어 해무가 약간 낀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사초와 갈대가 많았습니다. 줄무늬와 얼룩무늬의 키 큰 사초들이 시원하였고 아래엔 대나무가 무성하여 화려한 색감의 꽃들로 가득한 정원보다 소박하고 기품 있어 보였습니다. 정갈한 모시옷을 입은 선비 모습 같기도 하고 쪽빛 무명옷을 입은 가난한 사대부가 안주인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기분 좋은 화단을 지나 해안 쪽으로 가니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퐁, 풍, 풍” 큰 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닌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구멍이 열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물고기 하품소리 같기도 합니다. “폭, 퐁, 폭” 갯벌이 숨 쉬는 소리입니다. 자신의 몸에 난 구멍으로 작은 호흡을 토하면, 눈을 껌벅이는 어린 짱뚱어가 겁 없이 장난질에 열중해 돌아다니고, 그 옆에서는 길고 가느다란 어떤 녀석이 꼼지락거리고, 작은 칠게는 “바르르 바르르” 몸을 떨며 구멍 주위를 다닙니다. 다리 긴 백로들의 주둥이질에도 어린 녀석들은 겁이 없습니다. 갯벌은 곤하게 자는 듯 고르고 가늘고 조용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모자라지도 더 할 필요도 없는 족한 그대로의 자연입니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실천적 미학을 가진 건축가, 승효상. 그는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기’를 주장합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한번 뱉으면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났다 해도 바뀌어 지지 않으며 따라서 잘못되었으면 용서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건축가입니다. 그는 건축에서 ‘무용의 공간’을 이야기하며 딱히 쓸모없어 이름 짓기조차 어려운 그런 공간은 건축의 생명력을 길게 하며 정해진 규율로 제시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다양하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쓸모없음의 쓸모’,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떠올렸습니다. [장자] ‘소요유’(逍遙游) 마지막 부분에서, 장자는 죽마고우인 혜시(惠施)가 자신의 집에 큰 가죽나무가 있는데 몸체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튀길 수 없고, 가지는 꼬불꼬불해서 자(尺)를 들이댈 수 없어 재목감으로 쓸모없다고 불평을 하자, 그는 그 나무를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한가로이 소요하며 노닐다 드러누워 자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그 나무는 도끼에 찍히는 일이 없으니 쓸모없다는 게 어찌 근심거리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즉 쓸모 있는 나무들은 그 유용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수명을 다하지만, 쓸모가 없음으로 인해 인생을 자유롭게 소요(逍遙)할 수 있는 나무로 자란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장자의 이야기와 승효상의 건축이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현대인은 나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고 문제의 정답만을 찾아내는 너무나 이해타산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필요로만 채워진 세상, 가짐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스스로를 계층화시키고 테두리 속에 가두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생각으로 충만한 유목적 삶을 위해서는 승효상 건축가가 말하는 ‘빈자의 미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짐보다는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고,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 중요하다.
저도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 수 있는 그런 멋진 삶을 꿈꿉니다. 바닷가에서 천천히 호흡하며 수많은 생명을 품어주는 갯벌의 멋진 모습처럼, 내 것이라는 소유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우리의 삶으로 내 것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뚝뚝 땀이 떨어지는 계절입니다. 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건강 조심하십시오.
『빈자의 미학』, 승효상 지음, 느린걸음, 2016(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