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한창인 요즈음 일개미들이 정신없이 먹이를 나르는 것처럼 논두렁 한 가운데에 볏 집단을 태산만큼 크게 쌓아놓아야 일이 끝난다. 집에 돌아오면 가을걷이로 수확해 놓은 콩과 팥이며 고추 등을 말리느라 앞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농작물로 꽉 들어차 있다. 씨받이로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옥수수를 쳐다보면 마음도 풍성해져서 괜히 기분까지 좋아진다. 마당 한 가운데 심어 놓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빨갛게 익은 감을 긴 대나무에 감을 쉽게 딸 수 있도록 갈고리를 만들어서 따낸 후 큰 항아리에 물을 넣고 우려내면 이튿날 달고 맛있는 감으로 변신한다. 그래도 겨울에 까치가 먹으라고 몇 개는 안 따고 남겨둔다. 호박, 가지, 토란대 등의 나물을 가을볕에 말려야 색과 맛이 오래 보존된다며 햇볕만 있으면 광주리에 담아서 마당 한 가운데에 내놓으신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형제들끼리 서로 등목을 해주는데 찬물을 등에 끼얹고 난 후 수건으로 닦을 때의 그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독특한 시원함과 개운함이 있다.
온 가족이 희미한 등불하나를 켜놓고 마주 앉아 함께 먹는 저녁 맛은 꿀맛이다. 고추를 송송 썰어 새끼 호박 몇 개를 통째로 넣고 어머니께서 손수 끓여주신 된장찌개 맛은 잊을 수 없다. 어쩌다가 동네 어르신들이 막걸리 한 잔이라도 거나하게 드시고 흘러간 노래를 부르면 곧바로 마을 노래자랑으로 이어져서 우리 집은 잔치 집이 되어버린다. 농사를 짓는 동네 어르신들은 그렇게 노래와 술로 농사일의 시름을 달래고 다음 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으로 달려간다. 마을 입구에 우리 집에 있었기에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놀이터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온 가족이 화로 주변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언제쯤 익을까?’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내고 노오란 속살이 보일랑 말랑할 때 “호호” 입김을 불면서 총각김치에 턱 걸쳐서 먹으면 정말 맛있다. 고구마를 캐는데도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우선 고구마 줄기를 낫으로 걷어낸 후 보물이라도 캐듯이 조심스럽게 줄기 주변의 흙을 파낸다. 천천히 고구마 줄기 주변의 흙을 파내다보면 드디어 빠알간 고구마의 정체가 드러난다. 막 캐낸 햇고구마를 씻은 후 큰 솥에 삶으면 자연의 냄새를 흠뻑 느낄 수 있어 더욱 좋다. 설탕이나 잼이 귀했던 시절, 고구마를 가지고 조청을 만들어 조청에 떡을 찍어 먹으면 그 맛이 환상적이다.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날, 둘째 형님께서 사오 신 달콤한 수박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하고 좋았던지 그 날 이후로 동네 사람들이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지체 없이“수박장사 유.”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도 수박 장사를 하면 수박은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큰 마당과 사립문이 있었고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온종일 시끄럽게 뛰노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마라." 며 크게 개의치 않으신다. 일찍이 홀로 되신 어머니셨지만 마음만은 늘 부자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마실’(충청도 사투리로 남의 집에 놀러 감을 이르는 말)을 와서 담소를 나누거나 윷놀이를 하신다. 그런 분들 중에는 병수 형 어머니도 계셨다. 병수 형 어머니는 몸이 아프셔서 병원에 계시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병수 형은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농사일 거들어 주시는 날이 많았다. 형님은 어찌나 건강했던지 나를 번쩍 들기도 했고 쌀가마를 옮기는 데도 거침이 없다. 밥도 나보다 두 세배는 더 먹고 덩치도 컸다. 7남매 대식구인데도 늘 친형제처럼 지냈다.
학교 가는 길은 검정 고무신에 책 보따리를 매고 산으로 들로 걷고 뛰어가면 배에서는 ‘꼬르륵 꼬르륵’소리가 난다.
“야, 오늘 뗀따 할래.”
‘뗀따’는 학교를 안가고 놀다가 하교 시간에 맞춰서 집에 간다는 은어다. 학교를 안 가고 하루 종일 시간을 때우는 것도 쉽지는 않다. 집에서 싸왔던 누룽지는 아침나절 다 먹어버리고 점심때 쯤 되어서는 허기를 달래려고 동네 어른들의 눈을 피해 큰 바위 틈 속에서 생 라면을 부숴먹는다.
한 술 더 떠“ 잎담배 한번 피워볼까?”
바위틈 구석에서 잎담배와 성냥 그리고 종이를 꺼내가지고 오면 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호기심에‘콜록 콜록’ 소리를 내며 피우는데
“이놈들아, 학교 안가고 여기서 뭐하는 겨?”
갑자기 호통을 치는 소리가 있어 조바심 속에 바위 틈사이로 내다보니 동네 아저씨다. 학교 빼먹고 담배 피운 죄로 홀딱 벗고 저녁 늦게까지 동네 우물을 돌고 어머니께 부지깽이로 실컷 얻어맞고 학교 안 간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화장실의 구렁이 사건은 잊을 수 없는 대박사건이다. 낮에 밭에서 따온 참외를 많이 먹었던 탓인지 배탈이 나서 한 참 일을 보고 있는데 왠지 화장실 밑바닥이 보고 싶다. 그런데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내 고추를 물어버릴 모양으로 잔뜩 똬리를 틀고 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마당으로 뛰쳐나오고 집안 식구들은 “무슨 일이냐?” 며 한바탕 야단법석인데 큰 형님께서 작대기를 가지고 구렁이를 끄집어내어 처리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등하교 길 친구들과 함께 소꿉장난을 할 때도 도로 양 옆으로 활짝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언제나 방긋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반겨준다. 해맑게 웃고 있는 코스모스의 가냘픈 흔들림 속에서 우정의 꽃이 피어났고 신작로 가에 우리들이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서 소담스레 피어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쁨도 가득 피어올랐다. 발이 부르트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도 형형색색의 코스모스를 보고 있노라면 피로가 싹 풀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길도 쓸고 공터에 콩도 심고 마을 입구 행 길 가에 코스모스를 심는 애향단 활동에는 동네 친구들 대부분이 참가한다. 코스모스에 앉아있는 벌을 잡으려다 벌에 쏘인 적도 있고 코스모스를 꺾어다가 물병에 꽃아 두고 향기를 맡기도 했다.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해보면 코스모스와 같은 들꽃들과 더불어 사랑을 속삭이며 욕심 없이 살면서 따뜻한 우정을 꽃피웠다.
고향의 추석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며 형님 누님들이 “올 추석에는 어떤 선물을 사 오실까?”하루하루 기다림 속의 흥분과 긴장 속에 밤잠도 설친다.
오순도순 행복했던 어린 시절처럼 행복한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