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실보실 비가 내립니다. 노랗게 마른 마늘밭과 발밑에 납작 엎드린 보리밭 사이 골로 물이 제법 많이 고였습니다. 몽글몽글 솟아오른 매화나무 가지 꽃망울은 이 비가 그치면 그 찬란한 꽃을 툭 툭 터뜨릴 것입니다. 앞산에 진달래도 필 준비를 하며 분홍 치맛자락을 손질하겠지요. 결고운 봄비에 취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교무실에 앉아 강가 은사시나무에 눈을 맞춥니다. 저절로 입에서 “아, 참 좋구나.” 이런 말이 나옵니다. 대지를 적시는 비는 앙상하고 마른 제 마음도 편하게 눅여줍니다.
‘말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마커스 주작의 『책도둑』은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냉소적이고 사색적이며 연민으로 가득한 죽음의 신, 그는 죽은 이의 영혼을 영원의 컨베이어벨트로 나르는 일을 업무를 합니다. 그런데 한 영혼을 거두러 간 곳에서 책을 훔치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됨으로써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주 특별한 도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쟁의 비극과 공포 속에서도 말(言)과 책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버텨나갈 수 있었던 한 소녀의 이야기가 철학적이고 사색적으로 그려집니다.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빛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대지에 뿌려진 씨앗은 물과 흙을 만나면 어디서나 싹을 피워 올리듯 억압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희망이라는 꽃봉오리를 만들 수 있음을 생각하였습니다.
리젤은 책에서 한 페이지를 뜯어내 반으로 찢었다.
이어 한 장(章)을.
곧 리젤의 다리 사이와 둘레에는 말의 조각들만 흩어져 있었다. 말. 왜 이것들이 존재해야 하지? 이것들이 없으면 이런 일도 없을텐데. 말이 없으면 퓌러도 아무것도 아닐 텐데. 절뚝거리는 죄수들도 없고. 우리 기분을 낫게 해줄 위로나 세속적인 술수도 필요 없을 텐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제 리젤은 오렌지빛 방을 향해 소리 내어 말하고 있었다. "말이 무슨 소용이 있어?" pp. 309~310
강마을에 비는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저는 ‘말의 힘’이라는 화두를 머릿속에 넣고 새학기 업무를 준비합니다. 제가 벗들에게 보낸 새해 엽서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새해에는 소망하시는 일이 꼭 이루어지실 것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실 것입니다. 말의 힘을 믿습니다.”
말을 흔드는 소녀는 폭격을 피해 숨은 지하실에서 책을 읽게 만들고, 슬픔을 책으로 치유합니다. 그 자신이 말이 되어 사람들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우리들도 누군가를 위해 아름다운 말을 봄비처럼 내리는 그런 삶을 살면 어떨까요?
아름다운 낱말들이 사람들 사이에 비처럼 내리는 봄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얼굴에는 정말로 꽃이 폭죽처럼 터질 것입니다. 봄을 기다립니다.
『책도둑』,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옮김, 문학동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