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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봄 길 꽃길 속으로

긴 기다림 끝. 언제 찾아 왔는지 봄은 꽃과 새순으로 저마다 문장을 쓰느라 술렁거린다. 그들이 쓰는 문장은 우윳빛 화려체로 봄 길을 장식한다.

들녘과 산. 갈빛이 가시기 전 피는 꽃은 건조한 눈을 유혹하여 연둣빛 글 속에 빠지게 한다. 비둘기 구구대는 소리, 스치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의 나신은 물결처럼 행을 이룬다. 아기 볼을 만지는 햇살의 부드러움 속에 민들레처럼 피어난 환한 낮 꽃길을 걷노라면 생명의 속삭임이 가슴을 쿵쾅거린다. 사철나무 새잎, 통통해진 마늘, 붉은 눈물을 뚝뚝 피워 올리는 진달래가 겨우내 숨죽인 인내를 새로움으로 비켜 일어선다.


빈 논을 본다. 벼 그루터기 사이 지난겨울의 느낌표 사이 이름 모를 풀들이 융단을 깔고 야생화와 쑥부쟁이는 논두렁 밭 언덕을 수놓고 있다. 납작 엎드린 고들빼기와 냉이는 강약을 달리하는 바람의 입김 속에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갈빛 낙서장에 봄의 동시를 쓴다.

발아래 땅속 깊이 숨죽인 뿌리도 찬바람에 난도질당한 가지도 모두 봄을 피워내느라 바쁘다. 별꽃을 달고 있는 생강나무, 애벌레 꽃을 달고 있는 오리나무, 붓끝처럼 모아 올려 기도하는 자목련 봉오리. 꽃과 나무가 벌이는 향연은 한 줄 문장과 한 행의 시로 봄을 훔치게 충동질한다.

이 봄 길 꽃길에서 만나 꽃과 새순은 잘난 체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고 있다. 그 침묵의 조화 속에 봄은 향기를 더한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숙연해져 고운 감사를 드리고 싶다. 긴 추위의 기다림 끝에 나온 그들의 싹틔움을 고귀함이란 현학적인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여 낮아진 밭이랑 사이를 걷는다. 이랑 사이에 피어난 홍매화와 옥빛 앵두꽃은 통통한 마늘과 쪽파의 짙은 녹색에 대비된다. 연분홍 붉은 속살을 머금은 봉오리는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잎새에 분홍 눈 흘김만 쏟아낸다. 한 송이 한 송이 자세히 들여다본다. 꽃을 감싸고 있는 꽃받침과 꽃잎의 돋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누구의 작품일까? 모두 힘을 모아 작은 세계를 열어젖히는 모습은 신이 아니면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꽃 속에는 우주가 숨어 있다.

느린 걸음과 사유가 시간의 물레를 돌린다. 내가 사는 지금은 모두 바쁘다며 종종거리고 손전화에 노예가 되었다. 일초라도 좋다 꽃잎을 타고 물드는 봄바람에 가끔은 탈출구 없는 정신을 놓고 혼자임을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 했다. 악의를 품은 사람도 꽃을 바라보면 나쁜 마음이 지워진다. 마음은 유순해지고 이슬처럼 맑은 원초적인 몸짓 한 조각을 발견할 것이다.



봄 길 들길. 온 산하에 피어나는 봄꽃과 야생화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생명의 유한함에 순응한다. 피어날 때 져야 할 시점을 알고 약속을 지킨다. 생명의 흐름을 따르며 탐욕과 명예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의미도 던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가? 더 욕심내고, 더 많이, 더 높이 오르려 한다. 이런 모습은 봄날 한 포기 풀과 야생화만도 못한 심성을 가진 것이 사람임을 알게 한다. 봄꽃과 새순의 태동에 우리는 부끄럼을 가져야 한다.

병아리 깃털 같은 햇살이 피어나는 삼월 한낮. 연둣빛 진한 오리나무 향이 코를 스칠 때 봄 길 산길을 걸으면 일상이 헤집은 멍든 마음은 따스해진다. 추위와 칼바람에 엎드린 기다림을 꽃으로 피워 올리는 환희를 보며 내 삶도 언젠가 작은 꽃으로 피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해본다.

봄 길 꽃길. 그 길은 향기로운 문장에 반성이 쓰인 일기체이다. 그 길은 내가 알고 있는 눈과 지식으로 읽어내기에는 부족하다. 그 길 앞에서는 언제나 고개를 들지 못한다.

얼마 가지 않을 봄 꽃길! 화사한 인내로 묵묵히 하루를 피워 올리는 처연한 모습을 보며 삶이 힘들다고 엄살 부리지 말아야 한다. 한 걸음 꽃보고 한걸음에 하늘 보며 그 순수의 아름다움에 반하는 봄바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봄 길 꽃길 앞에 가슴을 열고 부끄럼 없는 시간을 보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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