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Ushuaia)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까지 장장 3,000km에 달하는 우리의 로드 트립 이야기를 듣는다면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 400km니 얼마나 머나먼 길인지 가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 당장 어디서 자게 될지도 알 수 없고, 끼니는 어떻게 때워야 할지, 한 시간 후엔 과연 어느 하늘 아래에 서 있을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계획하거나 어림짐작을 할 수조차 없는 로드 트립이었지만 다시 돌아간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임을 안다. 집 떠나 기꺼이 고생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 그건 고생이 아니라 용기이고 낭만이요, 돈으로는 채우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었다.
다시 돌아간대도 기꺼이 ‘로드 트립’
멕시코에서 시작된 우리의 여행은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를 지나 아래로 내려갔고, 집 떠난 지 반 년 만에 대륙의 남쪽 끝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도달하게 되었다. 남아메리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 경우, 다음은 보통 부에노스아이레스다. 3,000km가 넘는 이 구간에선 2박 3일을 쉬지 않고 달리는 장거리 버스를 이용하거나 몇 시간 만에 도착하 는 비행기를 타게 되는데, 비용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후자를 선택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버스 가격에 맞먹는 싼 비행기 티켓이 매진되는 바람에 열흘 후에나 저렴한 비행기 티켓이 나올 거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터덜터덜 호스텔로 돌아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우리를 보고 요하네스라는 외국인이 말을 걸었다.
“마침 내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자동차가 있어. 너희가 운전만 할 줄 안다면 아직 두 자리가 남았으니 함께 가지 않 을래?”
“정말? 고마워! 우린 부에노스아이레스 까지만 가면 돼. 모로 가도 목적지까지만 가면 된다고!”
사실 자동차의 주인은 요하네스가 아니라 다른 호스텔 손님인 타냐였다. 주인은 따로 있는데, 남 걱정에 먼저 도움의 손길 을 내미는 속칭 ‘오지라퍼’인 그는 6년째 혼자 세계 여행중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상 황을 전해들은 타냐 역시 흔쾌히 이번 여행에 함께할 것을 동의해주었다. 남미에서 유학 중인 딸과 여행을 한 후 고국으로 돌아간 부모님을 대신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혼자서 렌터카를 반납하러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다만 작은 차라 좀 불편할 거라며 오히려 우리를 걱정했던 마음 착한 타냐의 도움으로 로드 트립을 시작할 수 있었다.
푯말 따라 움직이는 즉흥 여행의 끝판왕
다음 날 새벽, 프라이드만한 타냐의 차 트렁크에 커다란 배낭 3개가, 남편과 내가 탄 뒷좌석에 나머지 배낭 하나가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타냐의 말처럼 사람 4명에 사람만한 배낭 4개가 꽉 들어찬 자동차는 매우 비좁았지만, 창 너머 세상 끝에서 솟 아오르는 희망찬 태양 빛에 우리들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었다. 묵직하게 출발한 타냐의 빨간 자동차는 우수아이아의 찬바람을 타고 점차 제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의 3번 국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배가 고프다고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을 찾아 끼니를 해결할 수도, 용변이 마렵다고 가까운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시간째 같은 풍경을 맴돌고 있는 광활한 땅덩이 위에선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니까. 매직 아이를 보듯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타냐, 요하네스, 남편이 차례를 바꿔 운전대를 잡은 후에야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저기서 간단히 엠파나다(밀가루 반죽 속에 고기나 야채를 넣고 구운 아르헨티나 의 전통 요리) 하나 사 먹고, 장을 본 다음에 다시 떠나자!”
우리는 동시에 똑같은 가게를 가리키며 똑같이 외쳤다. 이번 대장정이 빛을 발 했던 이유는 이처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마음’에 있었다. 사실 여럿이 함께 여행을 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양보와 배려’라는 이름의 ‘눈치 보기’인 경우가 많은데, 이번 여행에선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특히 한국 사람들과 함께 여행할 때면 많이 겪게 되는 장보기 문제가 그런 예다. 각자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다른데 왜 다 같이 물건을 고른 후 N분의 1을 하자는 걸까? 늘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럴 땐 외국 친구들의 개인주의가 참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각자 저녁으로 때울 샐러드 하나, 요거트 하나, 라면 몇 개를 산 후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와!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선 잠시 차 를 멈추고 심호흡 한 번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저기 저 큰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자!”
“오늘은 몸이 찌뿌드드한데, 호스텔에서 잘까?”
“쳇! 도미토리 가격이 너무 비싼 거 아니야? 저 가격 주고 저기서 잘 바엔 그냥 오늘도 차에서 자는 게 낫겠어!”
2박은 차에서 2박은 로지(lodge)에서 잠을 잤다. 차에서 자는 날엔 두 명은 앞좌석 을 젖히고, 한 명은 뒷좌석에 구겨져서, 그 리고 요하네스는 자신의 텐트 속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이면 서로의 얼굴을 못 알아 볼 정도로 퉁퉁 부어서 일어났지만, 그 누구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각자 샐러드 하나, 요거트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거 나 둘이서 라면 한 개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드넓고 거대한 아르헨티나의 풍경 앞에 서 점차 마음의 여유가 생긴 우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차를 멈추고 대자연을 감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중 백미는 ‘펭귄 국립공원’이었다. 우수아이아에서는 아쉽게도 시즌이 끝나 펭귄섬에 가보지 못했 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수만 마리의 펭귄과 바다사자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번 로드 트립이 이토록 재미나고 멋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푯말 따라, 기분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인 결과였다.
두렵지만 흥미진진했던 ‘히치하이킹’
타냐와 요하네스와 함께한 지 5일째 되는 날 도착한 마을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그들은 잠시 그곳에서 쉬었다 가기를 원했다. 우리도 그러고 싶었지만 예약해놓은 갈라파고스 투어 일정에 맞추려면 조금 바삐 움직여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이제 남은 1,000km를 어떻게 더 가지?’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여행 베테랑 요하네스가 제안했다.
“히치하이킹 어때?”
“히치하이킹이라니? 이 위험한 남미 대륙에서 히치하이킹이라니?”
“너흰 남미 여행을 그렇게 오랫동안 하고도 아직도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거야? 세상 어디에도 100% 안전한 곳은 없어. 남미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해서 히치 하이킹 성공률이 높다고!”
차에서 자는 건 기본이고, 길 위에 서서 자본 적도 있는 우리는 히치하이킹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기로 했다.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4시간 넘게 휘청거리며 엄지손 가락을 치켜들고 서 있어도 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언제쯤 나타날지 모를 자동차를 기다리며 남편과 함께 걷고 또 걸었다.
우린 결국 친구들과 헤어진 지 3일째 되는 날 아침,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무사히 도착 했다. TV에서만 보던 히치하이킹으로 1,000km를 이동하다니 기적 같았다. ‘남자는 빼고, 여자 한 명 탈 자리는 있다’는 음흉한 트럭 기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천사였다. 다 큰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주던 가족, 신혼여행을 떠나는 중이라는 앳된 부부, 차체가 도로에 닿았는가 싶을 정도로 덜컹거리는 낡은 차를 타고도 너털웃음 끊이질 않던 앞니 빠진 아저씨, 엄청난 스피드광으로 어렵게 탄 차에서 다시 내리고 싶게 만들었던 풍채 좋은 할아버지까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우리에겐 하늘이 준 선물 같았다.
계획하지 않아도 삶은 재미나게 흘러간다. 인생이 즐거울 수 있는 건 한치 앞을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두렵긴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
세 단어로 알아보는 우수아이아 1.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비글 해협에 위치해 남극 항로의 기점이 되는 항구 도시다. 남극과 약 1km 거리이기 때문에 흔히 여행자들에게 ‘세상의 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지만 실제 대륙의 끝은 그보다 더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칠레의 혼곶 (Horn Cape)이라는 곳이다. 다만 지형이 험한 혼곶의 경우 접근성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우수아이아가 ‘세상의 끝’으로 유명해졌다.
2. 야생동물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부는 남아메리카의 대륙 끝에 위치하고 있어 뛰어난 자연 풍광은 물론 다양한 야생동물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야생 펭귄을 볼 수 있는 칠레의 레이 펭귄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 몬레 레온 국립공원을 소개한다. 레이 펭귄 국립공원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흔하지 않은 종인 킹펭귄을 볼 수 있으며, 몬테 레온 국립공원에서는 수만 마리의 마젤란펭귄과 바다사자를 볼 수 있다.
3. 날씨 우수아이아는 우리나라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겨울일 때가 그곳은 여름이다. 11월에서 2월에 방문하면 우수아이아는 여름에 해당한다. 기온은 약 18도 정도이나 바람이 불거나 해가 지면 추위를 느낄 만큼 서늘하니 우수아이아 여행 시에는 반드시 두꺼운 옷을 준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