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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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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집의 아궁이

등 뒤에서 해가 서산에 추운 몸을 기대기 시작하는 시각이다. 나뭇가지를 훑어 낸 삭풍이 창문을 흔들고 빠져나간다. 어둠과 함께 몰려오는 한기를 떨치고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보일러 버튼을 누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은 따스해져 온다. 참 편리한 시대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유년의 촌집 부엌이 차르르 살아난다. 지금 그곳의 아궁이는 거미줄만 일렁이고 녹슨 가마솥만 숨죽인 채 시꺼메진 그을음과 먼지 더께만 켜켜이 쌓여 있다. 텅 빈 정지! 생각해 보면 저만치 마른 풀꽃 같은 바람이 불고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마음은 바람이 되는지 가슴이 시리다.

 

어느 겨울 이런 아침, 전날 밤 빨아서 마루에 둔 걸레는 가오리 짝이 되었다. 춥다고 이불속에 파묻혀 있지만, 덩그렁! 미명의 하루는 어머니의 솥뚜껑 여는 소리로 시작된다. 방바닥도 식어가고 외풍이 심해 방 안에 있기보단 차라리 정지에서 불을 쬐는 것이 더 따뜻할 것 같아 아궁이 앞에 앉는다. 자작자작, 탁, 탁 타닥.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에 솔갈비를 모아 지피자마자 아궁이는 환해지며 따뜻해진다. 덤으로 삭정이며 솔가지도 꺾어 넣는다.

 

어머니는 춥다고 자꾸 방으로 가라고 하지만 불 지피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 떠날 줄 모른다. 더운물을 퍼내고 삶은 보리쌀을 깔고 쌀 한 뚜껑을 가운데 앉히고 솥뚜껑을 닫는다. 하지만 불 조절을 잘해야 되는 데 재밌다고 자꾸 지펴 밥을 태우곤 꾸중을 듣는다. 이날 아침의 숭늉은 눌어붙어 까만 보리쌀 누룽지가 반이다.

 

촌집에는 아궁이가 네 개가 있었다. 정지에 두 개, 아래채 방 두 개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정지의 아궁이는 밥하고 국 끓이는 아궁이, 아래채 아궁이엔 외양간이 딸린 소 죽 쑤는 아궁이, 작은 방 아궁이는 구들 밑 깊숙한 곳에 장작을 넣어 지피는 함실 아궁이다. 하지만 외양간이 딸린 아궁이가 소죽 쑤는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겨울이 되면 군불 때는 일이 중요한 일과였다. 이른 새벽 방구들 밑이 시끄러워 일어나면 불당그래로 재를 끄집어내고 장작을 고래에 넣고 계신다. 날이 더 춥다고 생각할 때면 장작도 더 많이 넣는다. 호들갑을 떨며 불 때기 좋아하여도 새벽녘 찬 바람이 싫어 누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도 내색 없이 그렇게 사시다가 가셨다. 어머니의 군불 지피는 모습을 떠올리며 사랑은 호들갑스러운 것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에서 도도히 흐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사랑의 흐름을 알았을 땐 어머니는 구들 안을 휘젓고 굴레를 벗어던진 연기 같은 삶을 마감한 뒤였다.

 

겨울이 다가오면 언제나 땔감이 걱정이었다. 가까운 산에는 나무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는 톱, 도끼, 괭이를 들고 먼 곳까지 가서 그루터기를 뽑아 오고 장작을 준비하여 나뭇가리를 만드신다. 이렇게 한 철 땔감을 준비해 놓고는 방고래 청소를 하신다. 부엌의 아궁이와 몇 군데를 헐고 긴 막대기에 당그래를 연결하여 고랫재에 쌓인 묵은 재를 끄집어낸다. 이렇게 묵은 재를 청소하고 나면 불은 소리를 내며 아궁이 속을 지나 부넘이를 넘어간다. 불이 잘 드는 것을 보며 보이는 곳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은 아궁이 구들장 청소가 중요함을 알게 해 준다.

 

내 가슴에도 아궁이가 있다. 그 아궁이는 여유로운 충만히 없이 온통 셈 빠르게 이익을 추구하는 모양새다. 겉으로 보여주는 것에만 가치를 둔 시꺼메진 그을음을 덮고 있다. 언제나 팍팍한 지금의 현실에서 가슴을 뚫고 나갈 출구만 바라며 억지를 부린다. 욕심과 알 수 없는 허기진 갈망으로 불을 때니 아픔 서러움과 막막함이 더뎅이가 되어 막고 있으니 편한 불길을 기대하기 어렵다. 온갖 사유로 막혀 있는 가슴의 욕심을 덜어 내야 한다. 이른 새벽 군불을 지피는 어머니 사랑이란 당그래로 가슴을 후벼내면 좋겠다.

 

인도의 불교 설화에 보면 한고조(寒苦鳥)라는 전설 속의 새가 있다. 한고조는 천축(天竺)의 설산에 살며 해가 뜨면 양지바른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며 남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밤이 되면 집이 없어서 추워서 덜덜 떨었다. 그럴 때마다 한고조는 스스로 다짐하기를 날이 밝으면 둥지를 지어야지 하고 다짐을 하지만 날이 밝으면 또 양지바른 곳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논다고 간밤의 추위를 까맣게 잊고 사는 새이다.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우리들의 모습이다.

 

보일러가 돌기를 한창 연료비 아낀다고 다시 제자리로 돌린다. 금세 뜨거워진 바닥이 식기 시작한다. 내가 자란 유년의 집 구들장은 밤을 새워 새벽까지 온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지금의 난방 시스템은 쫄랭이처럼 더워지고 식는다.

 

고향 집을 지키고 있는 아궁이와 구들. 생색내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몸을 뜨겁게 달구어 제 몫을 다한다. 겉보기에는 투깔스럽고 볼품없는 넓적 돌이지만 참으로 속 깊은 순순한 어머니의 품성과 사랑을 닮았다. 삭풍이 내리꽂힌다. 다시 보일러 버튼을 누른다. 패스트푸드 사랑보다 세상살이에 진눈깨비 맞으며 시린 손 비비는 인연들과 온돌방 아랫목의 온기 나누는 꽃불 같은 삶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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