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신문 김명교 기자] 지난 8일 오후 12시 10분 서울 영일고등학교. 오전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가는 발소리가 건물을 가득 메웠다. 운동장과 급식실로 학생들이 몰렸다. 같은 시각, 도서관에도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저마다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있었다. 오후 12시 20분. 하얀 칠판에 15분 타이머가 켜지자, 소곤소곤 말소리는 이내 책 넘기는 소리로 바뀌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에 집중하라는 교사의 잔소리도, 독서를 방해하는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여느 고등학교의 점심시간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이동욱 사사교사는 “대입을 앞둔 일반계 남자 고등학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닐 것”이라며 웃었다.
영일고는 지난해부터 ‘점심 독서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급식실이 붐비는 시간에 줄 서서 기다리는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프로그램이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골라 15분 동안 읽고, 기억에 남는 구절이나 느낀 점을 3분 동안 글로 정리한다. 3분간 기록한 토막글은 한 편의 독서 감상문으로 완성해 학교생활기록부에 활용하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이달의 독서상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새 학기마다 1·2학년생을 대상으로 참가 신청을 받는다. 도서관에 수용할 수 있는 적정 인원인 62명을 선발하는데, 매 학기 200여 명이 신청서를 제출한다. 이 교사는 “신청서를 통해 독서에 대한 열의와 열정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한다”면서 “경쟁률만 4대 1에 이른다”고 귀띔했다.
그동안 영일고는 학생들의 독서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밤새워 책 읽기와 아침 독서가 대표적. 밤새워 책 읽기는 시험이 끝난 후 학생들과 교사들이 마음껏 책을 읽어보자는 의도로 기획했다.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이 교사는 “최근 교육과정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각 교과의 수행평가를 하는 데 활용하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면서 “동료 교사들과 독서를 생활화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점심 독서운동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책을 실컷 읽어보자며 의욕적으로 밤새워 책 읽기를 진행했는데, 밤 12시가 넘어가니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고요. 일찍 일어나 등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아침 독서까지 권하는 것도 마음이 쓰였습니다. 학기 중 일과시간에 운영하는 게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줄 서서 기다릴 시간에 잠깐이라도 책을 접하면 좋겠다, 싶었죠.”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몰입할 수 있을까. 이 교사는 “긴 독서 시간은 오히려 학생들이 부담스러워한다”면서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읽는 게 독서 습관들이기에는 효과적”이라고 했다.
1학년 김태하 군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김 군은 “15분 동안 집중하고 궁금한 내용은 시간 날 때 찾아보는 방법으로 책을 읽고 있다”면서 “내용이 어렵지만, 얻는 것이 많다”고 전했다.
1학년 안제현 군은 중학교 때 일주일에 한 권 읽기를 실천하다 고등학교에 진학 후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 점심 독서운동에 참가했다. 안 군은 “15분씩 20일이면 300분이 되고, 책 한 권을 읽기에 충분하다”며 “꾸준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영일고는 학생이 전공하려는 분야의 개론서를 통해 진로를 탐색하는 ‘토요 진로독서행사’, ‘시사상식 경시대회’ 등 학교 도서관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제55회 전국도서관대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전국 학교 도서관 1만여 곳 가운데 9곳을 선정해 주는 상이다.
이 교사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에게 독서의 중요성과 학교 도서관의 존재를 알려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