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 오후 4시 춘천 한림대 연암관 2439강의실. 방학 중임에도, 그것도 드문드문 고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러시아어 수업을 받고 있다.
“자 이번 시간에는 러시아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이름과 애칭을 배워보자.” “먼저 알렉세이는 알료샤. 따라해 봐. 알료샤” “알료샤” “나딸리아는 나타샤” “나타샤”
칠판에 써진 낯선 러시아어 단어를 따라 읽으며 써보는 10명의 고1 학생들. 학교 여건상 편성할 수 없는 러시아어를 배우게 된 것은 바로 강원교육청이 여름방학을 맞아 마련한 ‘미개설 선택과목 위탁교육’ 덕이다. 대학 강사의 진행으로 하루 2, 3시간씩 진행되는 수업은 겨울방학에도 동일하게 실시되며 4단위 제2외국어 교육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7차 교육과정의 도입으로 교과 선택권은 커졌지만 학교마다 신청자가 서 너 명뿐이어서 늘 ‘소수의 희망’으로 묵살돼 개설되지 못했던 제2외국어, 사탐, 과탐 선택교과들을 방학 중에 개설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도교육청이 잇따르고 있다.
그 선두주자는 광주시교육청. 지난해부터 소수 선택 제2외국어 위탁교육을 구상해온 시교육청은 올해 조선대와 협정을 맺고 지난달 26일부터 2학년 학생 177명을 7개 학급으로 편성해 스페인어(86명), 러시아어(72명), 아랍어(19명) 수업을 하고 있다.
흩어져 무시됐던 35개 고교 학생들의 뜻이 한 교실에 모여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교육청은 “희망자가 적다는 이유로 각자의 진로에도 불구하고 이들 외국어를 배우지 못하는 것은 학습권을 제한하고 결국 교육의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 반 20명 내외로 편성된 학생들은 최신 시설의 어학실에서 전공교수와 원어민 강사가 팀티칭으로 진행하는 강의를 들으며 실력을 쌓고 있다. 8월 20일까지 평일 오후 2시부터 3시간씩 총 51시간, 그리고 겨울방학에도 51시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수하면 6단위를 인정받는다. 시교육청은 이들 학생에게 중앙도서관 이용권까지 주는 등 관련 예산으로 5900만원을 편성했다.
중등교육과 최윤길 장학사는 “앞으로 수준별 보충학습 교재를 개발해 조교들로 하여금 개별지도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원교육청은 올해 춘천·원주지역 고 1, 2학년을 대상으로 러시아어Ⅰ과 사탐 영역인 세계사, 법과 사회, 정치 등 4과목 5개 강좌를 2일부터 개설·운영하고 있다. 희망조사를 바탕으로 춘천고에는 세계사, 춘천여고에는 정치, 원주 북원여고에는 세계사와 법과 사회를 개설해 시내 학생들이
현직교사의 수업을 들으러 모이고 있다. 14일까지 하루 2, 3시간씩 28시간을 이수하고 겨울방학 때 40시간을 이수하면 4단위 과정을 인정받는다.
특히 유일하게 러시아학과가 있는 한림대와 협정을 체결해 개설한 러시아어Ⅰ 수업에는 10명의 1학년 학생들이 참여해 미래의 꿈을 키우고 있다. 춘천고 최일용(16) 군은 “나중에 러시아를 상대로 무역업에 종사할 생각이라 꼭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학교도 러시아어를 개설한 곳이 없어 수능을 보려면 문제집을 풀며 독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며 “이런 좋은 기회가 마련돼 무척 다행스럽고 대학에서 배우니 수업집중도 잘 된다”고 평가했다.
강의를 맡은 강정하(29·모스크바 국립대 박사과정) 씨는 “주요 인접국임에도 거의 접할 수 없었던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우리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어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교육청은 내년에는 1, 2학년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여 도내 18개 시·군 중 최소 11개 시·군에서 경제지리, 중국어 등 10여개 미개설 선택교과에 대해 위탁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중등교육과 이영섭 장학사는 “방학뿐만 아니라 학기 중 주말에 수업을 받는 방안도 함께 검토해 소수 선택과목의 이수기회를 최대한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북교육청도 9일부터 21일까지 진안제일고에서 중국어(9명), 전통윤리(22), 화학Ⅱ(7) 3학급을 개설해 2학년 38명이 ‘계절학기’를 이수하고 있다. 올해는 진안·임실 지역 7개 고교 학생을 시범 대상으로 정해 이중 진안제일고, 마령고, 임실고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수업은 관내 교사, 순회교사, 원어민 강사가 맡아 하루 4, 5시간씩 50시간(18시간은 과제수업으로 대체)을 여름방학 때 모두 이수하는 과정으로 꾸려졌다. 버스로 30~50분을 이동해야 하는 먼 거리인 데다 겨울에는 통학이 쉽지 않은 지역 특성을 감안해서다.
중등교육청 김효순 장학사는 “운영성과를 평가해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지만 워낙 소규모 학교가 지역적으로 퍼져 있는 특성과 예산 부담 등 선결과제가 많다”고 말한다.
제주도교육청은 올해 제주외국어학습센터에 중국어 과정(여름·겨울방학 동안 68시간)을 개설해 도내 8개 고교 1, 2학년 25명을 대상으로 현직 교사와 원어민 교사의 팀티칭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 3월부터는 독어, 불어, 물리Ⅱ, 화학Ⅱ 등으로 교과를 확대해 1~3학년에게 8개 과정을 이수하게 할 계획으로 예산 확보에 주력할 방침이다. 중등교육과 김수환 장학사는 “11, 12월 전체 학생의 요구를 조사해 방학 외에 가능한 주말을 이용해 소수 선택교과를 이수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