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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김민수의 세상 읽기 ⑭] 생각하는 갈대

가을 단풍은 곱게 붉고, 들판의 억새는 하늘거린다. 최근 서양 억새 중 하나로 알려진 분홍색의 핑크뮬리(Pink Muhly)에 대한 관심이 높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는 이 식물을 전국적으로 조성되고 있는 생태공원 등에서 적극 옮겨 심으면서, 날씨 좋은 가을날에 많은 이들이 핑크뮬리 군락지를 찾고 있다. 때로는 예쁜 사진을 찍느라 군락지를 비집고 들어오는 행랑객으로 인해 핑크뮬리가 몸살을 앓기도 한다. 

 

우리나라 토종 억새는 높이 1~2m로 핑크뮬리보다 조금 더 크다. 뿌리줄기는 모여 나고 굵으며 원기둥 모양이다. 잎맥 희고 굵다. 야산에 넓게 군락을 지으며 나는 억새는 가을바람이 불어 하늘거릴 때 그 흰색에 햇빛이 담기며 찬란한 분위기를 낸다. 가을 등산을 할 때 단풍만큼이나 반갑고 친근하기도 하다. 

 

억새보다 조금 더 크면서 억새와 같은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의 하나가 갈대이다. 갈대는 3m 정도까지 자란다. 갈대는 하천가, 도랑가 등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지만, 물흐름이 거의 없는 습지나 모래밭에 대규모로 자라난다. 낙동강 하류 가장자리를 따라 긴 군락을 이룬 갈대밭이 가을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 

 

갈대를 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은 햇살을 반사하며 흔들리는 풍경에 잠시, 잠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어린 시절 논둑길을 걸어가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도, 함께 거닐던 옛사람의 얼굴이 회상되기도 한다. 빛 사이로 드러났다가 감추어지는 어떤 아우라와 같은 신비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러다 깊은 사색에 잠길 때도 있다.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잊어왔던 물음을 갑자기 떠올리기도 한다. 
 
파스칼(B. Pascal, 1623년-1662년)은 그의 저서 《팡세》(Pensé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L'homme n'est qu'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 mais c'est un roseau pensant.)

 

파스칼은 계산기를 발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도 하지만, 저 유명한 ‘생각하는 갈대(roseau pensant)’를 말하면서 인간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고귀하고 위대한 삶에 대해 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지적 선물을 주었다. 

 

이 말의 뜻을 요약하면 이렇다. 갈대가 쉽게 꺾일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역시 연약하지만, 온 우주가 그를 죽인다고 해도 인간은 훨씬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의 실존을 알고 있는 인간은 우주보다 더 우월하다. 따라서, 인간은 고귀하고 존엄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는 것에서부터이다. 

 

억새나 갈대, 군집의 형태로 모여 있는 곳이 가을의 정취를 일깨워주는 이 풍경이 단지 사진 속 인물을 보좌하는 배경은 아니다. 인간을 닮은 갈대, 파스칼이 비유한 ‘생각하는 갈대’는 가을, 봄 할 것 없이 우리 주변에 늘 함께하고 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들, 한곳에 머물지 않으며 흔들거림이 많은 청년, 신경림 시인이 <갈대>의 첫 구절에서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라고 읊었던 것처럼 조용히 흔들이며 울고 있는 이들…. 그렇지만, 흔들거리면서도 인간으로서의 고귀함과 존엄함을 잃지 않는 모두가 ‘생각하는 갈대들’이다. 비록 된바람에 쉬 꺾일 듯 연약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힘을 지닌 이들이다. 

 

우리의 학생들도 갈대를 닮았다. 때때로 바람 따라 흔들거려도, 햇살을 받으면 그 잎맥 사이로 희고 밝은 빛을 반사한다. 우리는 갈대를 배경으로, 꺾어서 화병 속에 둘 것이 아니라, 넓은 들판에서 흔들리면서도 때때로 드러내는 그 빛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청춘은 아프기 때문에 청춘이 아니라, 결코 나약하지 않기에 청춘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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