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초록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 같은 참나무 무리의 톤 다운된 노랑 꽃차례와 보드라운 잎으로 가득한 산으로 들어서면 먹먹한 푸른 기운 앞에 숨이 막힙니다. 우렁우렁한 산이 깨어나고 산줄기마다 숨겨진 계곡은 맑은 물줄기를 개울로 흘려보내는 기분 좋은 소리로 부산한 계절입니다. 사시사철 산에 올라도 늘 다른 표정으로 만나는 산이 무성한 이곳은 대한민국입니다.
저는 숲과 강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다보다는 산에서 풍겨 나오는 푸른 기운과 나무들의 청청한 웃음과 산자락 접힌 곳에 흐르는 냇물에 발을 잠그고 있을 때 기분 좋은 서늘한 감촉을 좋아합니다. 숲으로 산책을 다녀와서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푸른 산과 맑은 물과 논바닥을 기는 거머리마저 그리워하며 힘없는 나라에서도 더 힘없는 백성들이 살기 위해 떠나간 먼 이국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입니다.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은 1905년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들의 이민사(移民史)를 그려낸 장편소설로 2004년 동인문학상 수상 당시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 경영을 강렬하게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백 년 전 멕시코로 떠나 완전히 잊혀 버린 이들의 삶을 간결한 문장과 힘 있는 서사로 생생하게 되살려낸 이 작품은 뜨거운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일제강점기 송곳 하나 꽂을 곳조차 없던 조선의 다양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안고 멕시코행 기선에 승선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지못해 사는 더욱 고통스러운 운명입니다. 1905년 4월 4일 제물포를 떠난 영국선 일포드에는 이민자 1033명이 타고 있었고, 그들은 에네켄 농장의 채무 노예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멕시코 전역을 떠도는 유랑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멕시코에 불어닥친 혁명과 내전의 바람 속에서 외인부대로 전전하다가 그들은 ‘신대한’을 국호로 내건 소국을 멕시코 어느 땅에 세워보지만, 정부의 소탕 작전에 의해 이름 없는 검은 꽃으로 뜨겁게 스러집니다. 농민, 몰락한 황족, 군인, 박수무당, 내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 군상과 그 속에 피어나는 젊은 사랑까지 이글이극 타는 남국의 지열과 그들의 시큰한 체취가 훅 다가설 것같습니다.
산은 다양한 초록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리고 저는 뜨겁게 작열하는 멕시코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운명과 마주하였던 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죽는 날까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푸른 보리밭 위로 새들이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봄날의 오후입니다.
『검은 꽃』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2010(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