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람들 사이를 매우 빠른 속도로 돌아서 가파르게 번져가는 것, 두 가지를 대라면 무엇을 대겠는가. 나는 그것을 ‘역병’과 ‘소문’이라 하고 싶다. 역병은 전염성이 매우 강한 괴질이고, 소문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 없이, 돌아다니는 그럴듯한 말이다. 이 둘은 ‘돌다’라는 동사와 호응하여 특유의 의미를 살려낸다. ‘역병이 돌다’, ‘소문이 돌다’라고 할 때,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역병이든 소문이든,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것이 첫 번째 공통점이다. 두 번째는 일단 돌기 시작하면, 그 번져나가는 현상을 쉽사리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역병이 도는 것을 막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걷잡을 수 없이 죽어 나간다. 소문이 도는 것을 막지 못하면 사회를 지탱하는 믿음이 사라진다. 그 소문이 나쁜 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라가 어지럽고 권력은 허물어진다. ‘돌다’에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두려움과 공포의 분위기가 이 말의 의미 주변을 감돈다.
돌면 선뜻 멈추기가 쉽지 않다. ‘돌다’라는 말은 ‘어지럽다’와 만난다. 계속 돌다 보면, 마침내 어지러워지는 현상, 이는 생리적인 현상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듯하다. 소문이든 전염병이든 멈추지 않고 돌면,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냉정하게 멈추지 못하고 계속 돌기만 하는 생각의 상태, 그렇듯 ‘고장이 난 생각의 사태’를 “돌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새삼 다시 음미 된다.
소문도 감염의 일종이다. 우리는 어떤 소문이 돌면, 애써 귀를 내어놓고 그걸 들으려 하고[感], 그 소문의 내용에 물들게 된다[染]. 소문을 대하는 프로세스가 감염(感染)의 프로세스와 흡사하다. 더구나 들은 소문은 나도 모르게 또 누군가에게 빠르게 퍼트리게 되니, 소문도 역병 프로세스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무서운 역병이야말로 병 자체보다 소문이 더 빠르게 번진다. 병보다 소문이 더 흉흉하고 무섭다. 인간은 먼저 공포에 지고, 다음에 역병에 무너진다.
소문의 전염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칭기즈칸이다. 질풍노도의 기병을 앞세운 칭기즈칸의 군대는 전쟁에서 적을 잔인하게 다루기로 유명했다. 저항이 심했던 지역에 대해서는 극도의 잔인함을 보였다. 이들의 잔인함은 금방 소문으로 퍼져갔다. 칭기즈칸의 군대가 오고 있다는 소문만으로 상대편은 패닉(Panic)에 빠졌다. 그의 군대가 무인지경을 달리듯 영토를 정복해 간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역병도 그러하다. 역병 사태를 맞는 인간은 심리적으로 더욱 심한 감염에 이른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에 시달리는 우리의 마음도 그러하다.
02
역병은 단순한 감염이 아니라, 집단으로 빠르게 전염되는 돌림병이다. 사람이 떼로 죽어 나간다. 병도 시체도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고, 속수무책 방도가 없는 역병을 옛날 사람들은 엄청난 공포로 받아들였다. 이런 무서운 역병은 신의 저주이거나 악마가 인간의 세상을 유린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때에 인간의 마음에는 악마의 존재가 더욱 뚜렷하게 도드라졌다. 악마의 대리인으로 희생양으로 마녀를 만들어 처형하기도 했다. 역병 앞에 인간의 두려움과 나약함을 입증하는 일이다. 이는 양태만 달라졌을 뿐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 전염되어 간다.
역병은 전쟁보다도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BC 699년경, 고대 중동의 강대국 아수르의 산헤립 왕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유대를 위협한다. 이집트를 치려고 하니 유대는 길을 내라고 한다. 유대 왕 히스기야는 그들의 신 여호와에게 기도하며 막으려 한다. 그러나 유대가 아수르를 전쟁으로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왕과 백성이 열성으로 기도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성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아수르 진영에서 군사 18만 5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모두 죽어 시체만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구약 열왕기 하 19장 35절)
일부 성서 해석학자들은 아수르 군의 전멸을 페스트 역병이 돌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칭기즈칸의 군대를 무력화한 것도 페스트 역병이었다. 유럽 정복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퇴각한 데에는 많은 군사를 페스트로 잃은 것도 한 요인이었다. 잔인함과 무서움의 소문을 몰고 두려움에 떠는 상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던 군대도 역병이 몰고 다니는 죽음의 위세에는 질 수밖에 없었다.
대하소설 <장길산>에도 역병 이야기가 매우 리얼하게 나온다. 조선 시대의 이야기이니 페스트는 아니고, 장티푸스 역병이 어떤 고을에 만연하게 된다. 관청이 취한 조치는 끔찍하다. 고을 사람들을 일체 마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는 그 마을을 통째로 불을 질러 버린다. 환자는 물론 가족과 어린아이들이 그대로 있는 채로 마을 전체를 불 싸질러 버리는 것이다. 그 옛날 역병 만연 시, 그 나름의 대처 매뉴얼대로 행한 조치였는지도 모르겠다. 참혹 처절함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일은 다시 소문에 실려 공포의 바이러스가 되어 세상 사람들 마음에 옮겨 갔으리라.
‘역(疫)’은 ‘염병 역’자이다. 욕설 중에 널리 유포된 욕설이 ‘염병할 놈’이었다. 전염성이 강한 역병에 걸려 죽을 놈이라고 저주하는 욕이다. 역병 바이러스의 강한 전염 이치를 생각하면, 이 욕은 저주의 범위가 넓다. 상대는 물론이고, 상대가 속한 가정이나 동네까지도 모두 역병에 걸려 멸해 버리기를 바라는 아주 고약한 저주의 욕이라 할 수 있다. 역병의 풍경이 이러하다. 역병은 오늘날에도 맹위를 떨치고, 우리는 불안의 터널에 갇혀 있다.
03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1947년에 발표한 소설 <페스트>는 페스트 역병으로 고립된 알제리 북부의 어느 해안 도시의 사태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무서운 페스트 역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참상을 그리면서, 불안, 격리, 도피, 우울, 좌절, 공포 등의 심리적 정경을 묘사한다. 온갖 이기심과 허위의식이 발동한다. 정치인도 성직자도 언론인도 민낯의 모습을 들켜버린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파이를 대하듯 의심의 마인드로 변해 간다. 상대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가 오래 계속될수록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더구나 이 역병의 언제 물러갈지 모르는 출구 없는 상태가 사람들을 소문에 매달리게 한다.
나의 오늘 삶이 감염인지 아닌지 불투명한 상태, 지인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음으로 치닫는 사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실존(Exist)에 대한 가장 절절한 경험을 한다. 내가 나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살아가기로 질병이나 통증만큼 각성이 강한 것도 없다. 내 존재에 대한 확실함이 없을 때, 사람들은 예언에 매달린다. 실제로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보면, 온갖 예언들이 난무하고, 예언서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글쟁이들을 동원하여 가짜 예언서를 급조하여 파는 출판사들도 나온다.
사람들은 쉽게 분노하고, 그런가 하면 분노를 상실하기도 한다. 만인은 만인을 탓한다. 그런가 하면 타자에 대해서 점점 무관심해진다. 당국이 발표하는 새로운 환자 수와 사망자 수에 대해서, 처음에는 진지하게 품었던 애도 연민도 조금씩 사라진다. 그저 무표정한 수치로만 읽을 뿐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와 방불하다.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으며 무엇을 얻고 있는가.
신의 영역에 있는 바이러스의 세계와 인간의 영역에 있는 면역의 세계는 서로 ‘밀고 당김의 긴 역사’를 가져왔다. 질병을 통하여 인간은 고통을 겪으며, 바닥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성찰의 시간을 겪는다. 질병의 진화만큼 인간의 면역 기제도 진화한다. 인간의 정신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진지하기만 한다면, 비관도 힘이 된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맨 끝 대목에서 나는 그런 암시를 받는다.
전염병이 물러갔다. 시민들이 환성을 지른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이 소설의 기록자, 그의 직업은 의사이다.)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음사 발간,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페스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