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거짓말과 가짜 뉴스가 온통 우리 사회를 뒤덮어 혼돈의 연속이다. 시중의 말 한 마디도 어느 것이 진실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모든 것의 판단을 유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상사를 신중한 언행으로 대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또 다른 부담이 버겁게 느껴진다. 그뿐인가? 하 루하루 편견과 불신으로 뭉친 이념과 사상의 집단이 쏟아내는 거짓 뉴스는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의 이성의 작동을 마비시키거나 심지어 이성과 등을 지고 살아가게 유혹한다. 그러니 세상을 올바로 살려는 선남선녀는 이래저래 세상살이를 신중하게 지탱하고 버텨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든 이런 삶 속에서는 몸과 마음이 고달프고 피곤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른바 ‘피로사회’와 ‘위험사회’라는 이중적인 굴레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을 알아보고 삶을 보다 평화롭고 안정되게 영위할 수 있을까?
먼저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다음의 예화를 들어보자. 페르시아의 황제 코스로스는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고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는 고문관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여러분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내가 좋은 황제라고 생각하시오? 만일 여러분이 거짓 없이 그대로를 말한다면 그 보답으로 값진 것을 선물할 것이오.” 고문관들은 황제 앞에서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이때 현자 엘림의 차례가 되었다. “폐하, 저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실은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니 솔직히 말해보시오. 그러자 현자는 “폐하께서는 저희와 같이 약점이 있고 실수를 저지르는 한 인간입니다. 폐하께서 축제나 궁전 건축, 특히 전쟁에 많은 예산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더니 약속한 대로 고문관들에게 보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엘림에게는 곧바로 수상직을 임명했다. 다음 날 고문관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제 앞에 왔다. 이 중 대표가 말했다. “폐하께서 저희에게 주신 보석들을 판 상인들을 처벌해야 합니다. 그 보석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황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희들의 말이 가짜인 것처럼 그 보석들도 가짜였다.”
그렇다. 진실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진실로 존재한다. 그럼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양심과도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양심은 진실을 밝히는 거울이다. 맑은 양심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기 때문이다. 위의 예화에서 보듯이 엘림의 양심은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이었다. 다른 고문관들은 좋은 말로 양심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엘림은 양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우리는 진실이 묻힌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주변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라. 오직 자신들의 패거리만이 모여서 정치를 한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소위 ‘친박’이니 ‘친문’이니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끼리끼리 모여서 한 사람을 중심에 두고 아첨으로 일관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나가려는 행태가 아닌가? 진영 논리에 빠져 타인의 목소리엔 귀를 닫고 오직 자신들만이 듣기 좋은 소리,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진실을 가두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모두가 여우라고 하는데 그들은 사슴이라고 우긴다. 그들에겐 과연 진실이 있는 것인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말, 듣기 좋은 소리, 꾸며내는 소리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진실인 양 내뱉으며 진실을 호도할 때 국가의 미래가 불안하다, 이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진실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진실은 승리한다고 말을 한다. 여기서 승리한다는 말은 거짓을 이긴다는 의미다. 진실과 양심은 양립(兩立)하지만 진실과 거짓은 양립할 수가 없다. 진실이 아니면 거짓이요, 거짓이 아니면 진실이다. 따라서 진실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면 양심도 돈으로 살 수 없다. 바야흐로 지금이야말로 대척점에 서 있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안목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현명한 지혜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