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사론
프레이리의 교육사상과 실천은 교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프레이리를 통해 깨닫는 것은 쉽게 말하는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라는 말이 타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프레이리에 따르면, 교육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이분하지 않으며 쌍방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프레이리(1985)는 ‘배움 없이는 가르침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가르침과 배움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교사(가르치는 자)와 학생(배우는 자)이 있어야 한다는 말 이상을 의미한다.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의미다. 즉, 프레이리는 ‘학습자로서 교사’ 역할을 중시한다.
프레이리는 교사가 학생에게 교육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프레이리가 비판한 은행예금식 교육이요, 길들이기 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프레이리에게 바람직한 교사의 역할과 모습은 끊임없이 배워나가면서 교사-학생 간 상호작용을 통해 배움을 창조하는 자다.
프레이리의 ‘교육이 정치’라는 입장에 따르면,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프레이리(1985)에 따르면, ‘교육의 정치 중립성’은 듣기에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교사가 중립적 입장을 띠는 것은, 빌라도가 그랬듯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 가치지향적 활동으로서 교육은 특정한 방향과 입장, 신념과 가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 또한 교육을 포함해 인간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사안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헌법은 ‘교육의 전문성·자주성·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31조), 공무원(교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다(7조)고 명시한다. 이러한 헌법 조항은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교육과 교사가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권리’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조항이다. 그런데 권리의 언어가 위협의 언어로 탈바꿈해버렸다. 그래서 교사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억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민주시민교육은 민주적인 토론과 소통문화가 교사와 학생의 배움 속에 살아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교과서 안에 민주시민교육을 소개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에서 명시한 것처럼, 논란이 되는 정치적·사회적 사안을 학교 안으로 가져오되, 학생들에게 주입해서는 안 되고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의 의미가 교사의 비정치적 중립성의 의미로 왜곡되지 않아야 함이 강조되고, 교사의 정치 기본권 회복(진냥, 2020)을 말하는 것이다.
교육의 정치성을 강조하지만, 또한 프레이리(1985)는 교육이 인식활동이자 예술적 사건임을 말하고, 교사의 첫째가는 임무가 교육의 예술적 측면에 있음을 강조한다. 즉, 교사는 세계를 인식하는 자이자, 정치가이며 예술가이기를 요구받는다. 교육이 인식 활동이라는 것은 프레이리에 의하면, 글읽기가 말 그대로 글자만 깨우치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읽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교사의 예술가로서 역할이란 무엇일까? 바로 교사의 역할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술가가 하듯이 새롭게 창조하는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교수 방법론에 치우친 교사들의 관심을 재고하게 한다.
프레이리(1985; 2001)는 전문가로서 교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자질로 ① 겸손 ② 인내와 갈망 ③ 관용 ④ 사랑을 강조한다. ‘겸손’이란 우리 앎의 한계를 아무런 고통 없이 인정하는 자질이라고 말한다. 이런 자세가 있어야 교육을 학생과 교사 간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내와 갈망’은 교사가 자신들과 다를지 모르는 학생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의 몫을 찾을 수 있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갈망해야 한다. 학생이 헤매고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더라도 손잡고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간절히 바라면서 인내할 수밖에 없다. 너무 강하고 조급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용’은 서로 다른 것에서 서로 다른 것을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교실 안의 다양한 학생들에게 섬세하게 반응할 수 있는 교사의 자질을 말하는 것이리라. 프레이리 역시 교사에게 ‘사랑’을 강조한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이나 부모-자녀 간 사랑과는 좀 다르다. 프레이리(1985)가 말하는 교사가 지녀야 할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란 어떤 부드럽고 감미로운 사랑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우리(교사)가 한계를 넘어서도록 학생들을 밀어주고, 주어진 과업에 대해 더욱 책임감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랑을 뜻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프레이리가 교사에게 강조하는 역할은 교실 안에서 단순히 교육내용을 잘 가르치는 자에 국한하지 않는다. 옳은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으면서, 학생에게도 그것을 일깨우는 자다. ‘교사는 있는데 스승은 없다’라고 한다. 오늘날 교사의 전문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된다. 그런데 프레이리를 통해 그 전문성이 교과를 가르치는 수업 전문성이라는 협소한 의미에만 갇혀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프레이리의 교육사상과 실천의 현재적 의의
프레이리(김부태, 2017에서 재인용)는 말년에 신자유주의 교육론에 대해 적응만을 강조하는 길들이기 교육, 소수 힘 있는 이들만이 혜택을 누리는 교육, 기술 훈련 교육만을 최선으로 여기는 실용주의 교육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 교육의 모습에서도 신자유주의 그림자가 짙게 나타난다. 프레이리는 인간·교육·역사에 대해 지속해서 변화되고 새롭게 생성돼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시사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스르기 힘들어 보이는 신자유주의 흐름에 어쩔 수 없다는 숙명론이 아니라, 교실 안과 우리 삶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억압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며 변화시켜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것이 지금 다시 프레이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프레이리의 사상과 실천은 오늘날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문해교육이나 장애인 야학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김한수(2018: 164)는 이 프로그램과 교재 내용이 프레이리가 강조한 ‘학습자로부터’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대화로서 교육은 없고 사회의 요구와 가르치는 자의 요구에 따라 길들이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프레이리의 교육사상과 실천을 다시 제대로 읽을 필요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