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아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선 풀일까 나무일까. 열매를 먹는 걸까, 잎이나 줄기를 먹는 걸까. ‘싱아’라는 말에서 시큼한 맛이 날 것 같긴 한데 어떤 맛이 날까.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초판을 낸 후 이 같은 궁금증이 많았는지 개정판 표지 다음에 싱아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여 놓았다.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1m 정도로 줄기가 곧으며, 6~8월에 흰 꽃이 핀다. 산기슭에서 흔히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나서 예전에는 시골 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코흘리개 시절부터 스무 살 대학생으로 6·25를 겪기까지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일제 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 6·25 발발과 1·4후퇴에 걸쳐 있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 보았다”고 할 정도로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다.
작가가 고향 경기 개풍군 박적골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따뜻하게 그려져 있다. 세 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 등 대가족의 사랑을 담뿍 받은 데다 무엇보다 대자연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여덟 살 때 교육열에 불타는 엄마 손에 이끌려 상경해 국민학교에 입학한다. 고향에서 마음껏 뛰놀던 소녀가 갑자기 서울 현저동 산동네에 틀어박혀 살아야 하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덟 살 소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것이 ‘싱아’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끊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언제나 젊고 싱싱한 내 기억 속 ‘싱아’의 맛
싱아는 메밀·여뀌·소리쟁이·수영 등과 함께 마디풀과 식물이다. 마디풀과 식물은 줄기에 마디가 있고 탁엽(잎자루가 줄기와 붙어 있는 곳에 달린 비늘 같은 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영도 싱아와 마찬가지로 줄기에 물기가 많고 신맛이 나서 시골 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요즘에도 싱아는 쉽게 찾기 어려운 식물이다. 국립생물자원관 김민하 연구관은 “옛날에는 싱아가 밭 주변이나 하천가 같은 곳에 많았는데, 그런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요즘에는 산에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다만 실제로는 소설 배경지 주변에 싱아가 있었지만, 꼬마 박완서가 찾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박완서가 헤맨 산은 인왕산인데, 인왕산 둘레길에 지금도 싱아 군락이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도 싱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사람이 있으면 인왕산 둘레길로 데려가 싱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있으니 그 당시에도 싱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린 박완서가 찾지 못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싱아 줄기의 새콤달콤한 맛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기회가 잘 오지 않았다. 싱아 줄기를 먹을 수 있는 기간, 그러니까 찔레꽃 필 무렵 싱아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았고, 보더라도 몇 그루 있지도 않은데 줄기를 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몇 년 전 경기도의 한 섬에서 싱아 군락지를 발견하고 줄기를 꺾어 맛볼 수 있었다. 생각만큼 시큼하지는 않았고, 약간 떫은맛이 나면서도 물기가 많아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약간 덜 익은 자두를 깨무는 느낌이라고 할까. 작가는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요즘도 싱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다는 독자편지를 받으면 내 입 안 가득 싱아의 맛이 떠오른다”며 “그 기억의 맛은 언제나 젊고 싱싱하다”고 했다.
정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작가는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책 중에 싱아란 소리는 네 번 밖에 안 나오는데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또 싱아가 어떻게 생긴 먹거리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싱아가 중요한 건 아니다. 싱아는 내가 시골의 산야에서 스스로 먹을 수 있었던 풍부한 먹거리 중의 하나였을 뿐 산딸기나 칡뿌리, 새금풀(괭이밥)로 바꿔 놓아도 무방하다”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어린 날의 가장 큰 사건이었던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에서 거스르고 투쟁하는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받은 문화적인 충격이랄까 이질감에 대해서다. 나는 아직도 그런 이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이렇게 성장소설, 세태소설 같은 분위기를 띠는 소설은 6·25가 발발하면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이때부터는 6·25라는 전쟁이 가져온 비극을 차근차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6·25는 작가의 숙부와 유일한 형제인 오빠를 앗아갔다. 작가도 인민군이 진주했다가 서울 수복으로 이어지고, 다시 1·4후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때 좌익활동을 한 오빠 때문에 빨갱이 가족으로 ‘벌레’ 취급을 받는 수난을 당했다. 작가는 모두가 피난을 떠나 텅 빈 서울에서 홀로 남았다는 공포를 느끼다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을 맞는다. ‘벌레의 시간’을 증언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도 갖는다. 박완서를 소설의 길로 이끈, 박완서 문학의 결정적 순간임을 밝히는 것이다.
1992년 처음 나온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2002년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150만 부 이상 팔리면서 작가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이 소설의 속편 격으로, 작가가 오빠의 죽음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미군부대에 취업하는 등 결혼하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박철화 전 중앙대교수(문학평론가)는 한 기고문에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통해 비로소 우리 현대사의 한 시기가 살아 있는 영혼을 얻게 됐다”며 “박완서는 뛰어난 작가이자 위대한 역사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