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공부하는 벗이 논문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여 마산문학관을 방문하였다. 그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노비산 자락의 문학관은 물 냄새로 흥건하였다. 그곳에서 만난 학예사께서 자료를 챙겨주시고 주섬주섬 한 권의 시집을 내어주셨다. 여름 끝자락에 받아든 시집을 집에 도착하여 내리다 그치기를 거듭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베란다 옆으로 붉은 배롱나무는 가지 끝에 꽃차례를 달고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비에 젖은 문학관이 자꾸 생각나는 시집이다. 시의 길이가 짧고 산뜻하다. 문득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가 생각났다. '5·7·5' 3행의 17자로만 구성돼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 불리는 하이쿠 몇 편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짧은 시가 가진 함축미와 선명한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조재영의 시집에는 짧은 단상들이 주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시를 읽으면 행간에 수많은 이야기를 침묵 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듯하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이란 그저 인간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의 표현 이상의 것이며,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면 스스로 옮아갈 수 있는 어떤 상태 이상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말이 끝나는 곳에서 침묵이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 뿐이라고 하여 침묵 뒤에 분명해지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초록 감잎 아래 그려놓은
작은 집 하나 / 「오월」부분
삶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한 번의 눈빛, 따뜻한 악수, 한 송이 꽃, 멀리서 북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가슴이 뛴다. 잊히지 않는 의미가 내 속에 각인된다. 이 시집 속에 오랜 침묵으로 묵혀진 그의 이야기를 꺼낼 때 몇 단어로 충분한 듯하다.
비가 오면
누군가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고 싶습니다. / 「산」부분
후설은 “인간의 정신은 대상을 단순히 자기 눈앞에 보이는 대로 사실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의 운동을 통하여 대상을 초월해 간다.”라고 하였다. 이 시집에서 시 속에 나타난 정신의 폭은 그의 삶의 넓이와 감응하고 있으며, 그 정신의 감응은 내면 속에서 오래 묵은 침묵을 지나 시로 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신의 폭은 자신의 바깥에 상응할 수 있는 자연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산, 나무(버드나무, 감나무, 대나무, 밤나무, 산딸나무), 꽃(국화, 해바라기, 찔레꽃, 할미꽃, 연꽃), 강, 대숲, 바람, 비 이런 것들은 도회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유년과 청년 시간을 지나온 침묵이 어느 날 영롱한 언어로 다시 모인 것이 아닐까? ^^
퐁당
꽃이 떨어졌다
고요한 아침이었다 /「청명」 전문
『짧은 여름』, 조재영 지음, 2018, 불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