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제5판, 2020)>을 다시 읽고 있다. 젊어서 읽었던 작품이다. 여러 평가가 있겠지만, 나는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존재론적) 주제를 이렇듯 깊이 있게 다룬 작품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즉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작가는 허다한 ‘종교적 교의’를 섭렵하면서, ‘신(神)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체험하려는 인물을 내세워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는 어딘가에 있을 ‘이상적 선신(善神)’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행로를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인간 존재를 탐구한다면서, 인간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인간과 대척의 자리에 있는 신을 이야기한다. 너무 우회적인 수법인가? 아니다. 그만큼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과 운명을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로서 ‘신의 이야기(신을 추구하는 이야기)’가 적실하다는 것이리라. 실제로 이 소설은 ‘신(神)을 향하는(또는 다루는) 인간의 본성과 태도’를 다양하게 접근한다. 작가는 고대 지중해와 페르시아·인도·로마 등 각 지역의 문화적 배경과 연관하여 여러 신과 교의(敎義)를 지적 긴장을 수반한 스토리텔링으로 조명한다.
이 소설의 묘미는 ‘이상적 선신(善神)’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행로가 파국에 이른다는 데에 있다. 그 파국은 ‘이상적 선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선신의 자리에, 선신과 맞섰던 악신(惡神)을 데려와 그의 의미를 새롭게 구축하려 하는 인간의 마음이 암시되어 있다. 그때 인간은, 그 일을 개벽 같은 새로움으로 굳게 믿으면서, 그것을 또 하나의 종교처럼 확신하려 하는 내면의 내달음을 보여준다. 이 ‘내달음’이 파국으로의 내달음이 된다. 나는 이를 ‘인간의 파국’으로 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인본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인간은 이렇게까지라도 해서 신의 영토에 닿아 있어야 하는가. 절대적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서, 인간은 자연의 위험과 생의 고통을 벗어나기가 이리도 어려운가. 절대적 존재와의 교섭 없이, 인간은 스스로 자유의지의 단독자가 되기 어려운가. 이 작품에서 인간을 해명하는 숨은 전제는 ‘신의 코드로부터 연계된 인간’인듯싶다. 인간의 의식계와 무의식계에 인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관여하는 그 어떤 초월적 존재(신)가 있다고 믿는 인간이 바로 ‘신의 코드에 연계된 인간’이다.
인간이 신과 교섭하는, 그 구체적인 증거는 ‘기도’이다. 그 허다한 종교의 교의에 기도는 필수 불가결이다. 기도가 생략된 종교적 교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명령은 불가하다. 기도 없이 절대자와 영적으로 소통하라. 기도를 배제하고 신을 향하라. 기도하지 말고 너의 신앙을 정련하라. 요컨대 인간이 신과 닿아 있는 코드는 ‘기도’이다.
<사람의 아들>의 작중 인물 아하스 페르츠는 신의 세계에 침잠한 인간의 선한 기원조차도 욕망과 무관하지 않은 어리석음으로 암시하기도 하지만(심지어 해탈의 추구까지도), 기도의 순기능은 종교와 문화의 현상을 통해서 인류학적으로도 잘 설명된다. 기도의 본질을 구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기도는 두렵고 약한 인간에게 위로와 구원을 접하게 하는 현상적 실존이다.
88올림픽이 있던 해, 그해 새해 벽두에 좀 암담한 선고를 받았다. 나는 세 살 딸아이의 건강이 부실하여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최종적으로 한 대학종합병원에 입원하여 여러 검사를 받았다. 예감이란 게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언가 막연하고 막막했다. 아마도 내 안의 불안감이 그렇게 차올랐다는 것이리라.
의사선생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의사선생은 내게 담담하게 말했다. 환자의 조혈기능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나는 치료법을 묻는다. 의사는 그 대답 대신 아이는 3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나는 오금이 접히며 주저앉을 것만 같다. 선생님, 내 아이를 살려주세요. 선생님, 어떡하면 살리나요? 의사가 무어라 답을 한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의사는 말한다. 골수이식이 유일한 방법인데, 골수를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주는 사람과 환자의 형질이 같아야 한다. 맞을 확률이 부모와 자식 간에는 1/125이고, 형제간에는 1/4이란다. 또 그렇게 맞아떨어진다 해도 수술과 치료의 과정이 길고 까다롭다. 수술을 마쳐도 족히 4~5개월은 병원 무균실에서 아주 취약하게 지내야 한다.
답을 들었지만 나는 더욱 막막해졌다. 울고 싶었다. 나는 오래도록 밀쳐 두었던 나의 신(神)을 찾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우선 제 아이를 살려 주시고, 그 대신 제가 감당할 다른 곤경을 주소서!’ 나는 이 유치한 기도를 입에 우물거리고 다녔다. 절실한 기도일수록 내용은 유치하다. 기도의 인간다움을 나는 절절히 체험한다.
암울함과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기도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를 진정시키는 방도라고 생각하니, 기도 안에 내 이기심이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관 앞에서 나는 너무도 간절하다. 나는 기도원으로 갔다. 오로지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며칠 낮과 밤을 금식하며 기도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나도 모른다. 기도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내 아이를 제발 살려주세요! 기도가 진할수록 반복이 점철된다.
나는 몇 가지 밝음의 기운을 내 안에 불러들일 수 있었다. 오래 밀쳐 두고 있던 내 집안의 신앙전통도 새롭게 환기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관과 불안을 걷어내는 자아가 살아나는 듯했다. 기도의 형식이 관여한 것인지, 기도에 매달린 나의 심적태도가 작용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기도의 모든 프로세스를 이성적으로만 설명하기에는 기도는 쉽게 분해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전보다는 소망의 기운으로 임할 수 있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걱정을 내가 밝게 달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병상에서 수시로 기도하는 나를 내가 발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딸아이는 다행히도 오빠의 골수를 이식받았다. 내가 근무했던 한국교육개발원 동료들이 혈소판 헌혈로 도와주었다. 모든 직종의 직원들이 그 많은 치료비를 갹출해 나를 울렸다. 나는 직장에서 누구에게나 머리를 수그렸다.
이런 선한 일들이 나의 금식기도와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그거야말로 신의 영역이 아닐까. 아무튼 내가 체험한 기도의 한 장면은 그러했다. 주관적 체험으로서 나의 기도현상을 말하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보다 더 절실하게 매달린 기도였음에도 보람을 이루지 못한 기도현상도 수두룩하다. 그런 면에서도 기도란 불가사의이다.
나의 체험을 기도의 결론으로 삼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아들>이 인류가 만든 종교적 교의에 ‘인간의 바람’이 박제되는 바를 암시하듯이, 그 교의 안에 있는 기도에만 갇힐 일은 아님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기도는 무의미한가. 무신론자에게는 아예 기도 자체가 없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특정 인격신의 교의에 갇힌 기도가 없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생의 고난과 위기 속에서 어떤 절절한 바람을 품는다. 동시에 위안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이를 승인한다면 특정의 종교적 신앙과 관계없이 인간은 ‘기도하는 인간’이다. 세상 만물이 신령의 자질을 지닌 것으로 믿는, 범신론자의 기도도 자연스럽고 더 자유로운 기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자체를 신으로 상정한 스피노자도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교의 교의에서 해방된 기도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향해서 나아갔다. 기도는 유신론자·범신론자·무신론자 등의 구분과 무관하게 인간의 의식·무의식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본성, nature)의 작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말한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고,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고,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고,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이문재, ‘오래된 기도’).
나의 잠언을 더해 본다. ‘어지러운 나’가 ‘정돈된 나’를 향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실천을 이끌고 가는 마차이다. 기도는 ‘반성’을 고양한다. 기도는 나를 돌아보게 하고, 그런 다음에 남을 살펴보게 한다. 기도는 분노와 혐오를 품어서 잠재운다. 눈을 감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행한다. 하나는 잠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잠을 자면, 이는 육신의 안식에 이르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 이는 영혼의 안식에 이른다.
새해를 맞는다. 그대, 어떤 기도를 준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