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낮은 수능 점수에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고 담임선생님께 대학 원서를 일임, 본의 아니게 예비교사 신분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공부를 하려는 의욕도,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나는 온전한 외톨이였다. 게다가 더 이상 군입대를 미룰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경교대란 경비교도대의 준말로 전국 교정시설에서 계호 근무 등을 담당하는 현역병을 말한다. 나는 대전교도소 논산구치소에서 2년 가량을 근무했다. 재소자인 교육생들 대부분의 목적은 검정고시나 자격증시험에 합격해서 모범수가 되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교육생 강사 자격으로 국어를 가르칠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나보다 어린 청년도 있었지만 아버지보다 높은 연세의 어르신도 계셨다. 그들 모두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교정청에 계시는 높으신 분이 순시를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일주일 전부터 인터넷을 뒤져 수업자료를 준비했다. 전에 없는 열강에 교육생들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놀랐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분은 중등반 중 한 곳에만 들어가봤다고 했다. 용의주도했던 준비는 물거품이 된 듯 허탈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교육생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늘 구석에서 한자시험 공부만 하던 뿔테안경 청년도 처음으로 고개를 든 채 내 강의를 경청했다. 반장이었던 대머리 아저씨는 여태껏 보충자료를 나눠주거나 땀흘리며 강의했던 강사는 없었다며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당장 그 날부터 나름의 교재를 만들어 나갔다. 평소 절반도 안 듣던 내 강의에 거의 모든 교육생들이 경청했고 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들고와 물어보는 교육생들도 늘어만 갔다.
강사를 그만두던 날 반장은 정말 감사했다며 가슴에 꽃을 달아주었고 한 교육생은 ‘철장 사이로 핀 꽃 한 송이’라는 글을 선물해줬다. 글 끝에는 자신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던 내가 한 송이의 꽃과 같았다고 덧붙였다. 난 여전히 특별한 재능도 없는 내세울 것 없는 학생의 신분이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예비교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교사의 위상은 바닥이고 공교육은 설자리를 잃었다지만 교육은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가운 철창 사이에서도 한 송이 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예비교사를 꿈꾸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작지만 중요한 신념일 것이다.
※이 글은 필자의 동의 아래 축약된 내용입니다. 전문은 한국교총 홈페이지(www.kfta.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