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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경기 시상중계를 보며 간간 느끼던 현상이다. 특히 유도·권투·태권도 등 격투기 경기 분야의 시상대에서 무심히 지나치지 않게 되는 장면이 있었다. 시상식이라는 게 대략 이렇게 진행되지 않았나 싶다. 경기가 끝나는 대로 금메달 선수와 은메달 선수와 동메달 선수가 정해지고, 이들이 시상대에 오르면 국제 스포츠계의 유명 인사가 나와 메달을 걸어주고, 악수로 치하한다. 이어서 메달리스트 선수들이 메달을 걸고 시상대에 서면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연주된다. 감격이 경기장 안에 번져나간다. 감격의 물결은 선수들 마음 안에서 더욱 격하게 요동할 것이다. 선수로서는 명예와 보람이 깃발처럼 나부끼는 장면이다.


금메달 선수는 갈등 없는 환희와 보람을 구가한다. 그러나 은메달 선수와 동메달 선수는 꼭 그렇기만 하지는 않다. 금메달을 얻지 못한 아쉬움은 은메달 선수나 동메달 선수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좀 유심히 보면 은메달 선수보다는 동메달 선수의 표정이 더 밝고 평온하다. 자기가 딴 동메달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모든 시상대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런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등위대로만 기쁨과 보람이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은메달 선수는 조금 전 결승전 경기에서 패배하여 은메달 선수로 확정되었다. 금메달 고지를 향해서 얼마나 이를 악물고 결승에 임했을까. 그런데 졌다. 패배의 아쉬움과 함께 패배의 현실(reality)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는 선수의 주관 감정이 느끼는 현실감이다. 이를 ‘패배의 현상학’으로 설명해 보자. ‘금메달에 도전했으나, 은메달로 확정’이라는 괜찮은 성과는 당당한 객관적 현실임에도, 은메달 선수에게는 그냥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적어도 당사자의 심리 내면은 그러할 수 있다. 그는 지금 우울하고 아쉽고 속상하다. 


동메달 선수는 조금 전 준결승전, 즉 3위·4위를 정하는 싸움에서 이겼다. 그래서 동메달 선수로 확정되었다. 그에게는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미 한번 진 적이 있다. 지금 시상대에 있는 금메달 선수 아니면 은메달 선수에게 한번 졌기 때문에 3·4위전으로 밀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으로서는 금이나 은에 대한 감정적 집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셈이다. 


3·4위전에 임하면서 그는 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란 나머지 지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을 잘 유지했다. 이 마음은 이기기만을 바라는 것과 심리 내적으로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등거리지 않고 여유를 축적해 두는 심리라고나 할까. 그는 상대를 물리쳐서 동메달을 걸고 메달리스트가 되어 시상대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감사와 은혜를 만끽할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3·4위전에서 패하여 동메달도 받지 못했다면, 아 그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이 될 뻔했던가. 그가 이렇게 가정하여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을 인식하는 데까지 갔다면, 바로 그 점이 그를 더욱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이런 경기 운영 시스템에서 3·4위전은 일종의 패자부활전 같은 위상을 가진다. 그리고 동메달 선수는 패자부활전을 거쳐서 동메달리스트가 된 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동메달리스트의 마음에는 패자라는 자기 정체성보다는 승자라는 자기 정체성이 더 강하게 자리 잡는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시상대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수상과 등위를 두고 안으로 생겨나는 이런 정서현상은 세계 모든 선수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라 할 수는 없다. 유독 한국선수들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국가대표 간의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죄인의 심정으로 돌아와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 경기에서 지면 나는 망한다’ 이런 불운의 예감에 시달리며 억눌리는 감정, 즉 디프레스(depress) 마인드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를 인간적으로 도닥거려 줄 여유가 우리에게 모자랐다. 그것이 그때 우리의 수준이었다. 침탈과 전쟁과 궁핍의 시대를 겪으면서 열등에 억눌렸던 국민의 정서도 그렇게 삭막해 있었던 것 아닐까. 관전과 응원과 승패를 대하는 데에도 시대의 표정이 그렇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이다. ‘경기를 즐기듯 하라’는 주문이 갖는 깊은 경지를 알 듯도 하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자랄 때 집이 너무 어려워서 고생을 했다. 중학교에는 들어갔지만, 수업료를 낼 수 없었다(그때는 중학교 수업료를 분기별로 냈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를 했다. 대학생도 아니고 어린 소년이 그렇게 해서 학비를 번다니, 얼마나 마음은 힘들고, 몸은 고단했겠는가. 그 일을 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학교에는 수업료를 면제해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혜택을 받자면 전교 3등 안에 들어야 했다. 소년은 전심전력으로 공부했다. 학년말에 그가 도달한 등위는 4등이었다. 수업료 면제는 어려워졌다. 소년은 낙담하지 않고 그다음 해에는 더욱 분발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번에도 4등이었다. 소년은 대처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에도 전교 3위 이내 성적 우수자에게 수업료를 면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는 전교 4위였다. 학비의 어려움은 여전했으므로 소년의 가정교사 노동은 고등학교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나의 지인에게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교 4위도 대단한 실력이다. 내가 분석하건대 중·고등학교 기간 내내 그가 짊어졌던 가정교사의 노역(勞役)이 없었다면 그는 1등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의 지인은 그의 고등학교가 자랑해도 좋을 정도로 대학 진학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다. 학교는 특별 사정회를 열어서 전교 4위이지만 대학 진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에게 대학 입학등록금을 지원하였다.


앞의 올림픽 메달 수여 장면으로 잠깐 다시 돌아가 보자. 그런데 정작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선수는 4등을 한 선수이다. 그는 3·4위전에 패하여 메달리스트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메달리스트들과 그리 큰 실력 차가 없을 수도 있다. 운명적이라 해도 좋을 기막힌 불운이 경기 중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시상 장면을 보는 사람들은 금메달리스트에게 환호하고, 은메달리스트의 분투에 연민을 보내고, 동메달리스트의 겸허한 행복감을 인정해 주지만, 4등을 위한 배려의 틈을 내어 줄 생각을 하지 못한다. 메달권에서 벗어난 인물은 빠른 속도로 인정에서 배제된다. 그러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4위의 성과에 보람을 심는 당사자 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당치 않은 소외와 좌절로 원망의 눈물을 뿌리는 당사자 선수도 있을 것이다. 아! 이 4위를 어떻게 다독거리면 좋단 말인가. 아! 이 4위를 어떻게 북돋우면 좋단 말인가. 

 

이 글의 제목이 ‘4등을 위해서’로 되어 있는데,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 글은 구체적으로 4등을 한, 그래서 네 번째로 존재하는, 그런 특정의 인물을 위해서 쓴 글이 아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4등’이란 어떤 권역에서 아깝게 그리고 다소 억울하게 밀려난, 그런 위치 위상을 표상한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보듬을 수 있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쓴 글이다.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에 우리 사회는 웬만큼 공감의 가닥을 가지는 듯하다. 당장 실천에 닿지는 못해도 심정적 지지를 한다. 그간 의식 있는 사람들이 격차와 차별에 대해서 노력을 기울여 온 때문이리라. 그런데 소외와 섭섭함은 공동체의 가장자리와 끝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꼴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의 범주들, 그 틈새와 골 사이마다 각기 그네들만의 단절과 서러움과 아픔이 있는 법이다. 갈등과 아픔은 양극에도 있지만, 양극의 중간 지대에 있는, 여러 결절점 간에도 그 나름의 위로가 필요한 곳이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올림픽이든 학교든 또 다른 어떤 곳이든 현실적으로 등위는 존재한다. 그러나 ‘절대적 등위’는 없다. 그 허상에 눌릴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에 그 등위가 어떻게 들어와 내 마음과 어떻게 화해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내 안에서 내가 매긴 ‘심리적 등위’를 잘 조정하고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학교는 학생들이 한 학년을 마치고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는 시점이다. 통지표를 받아 가는 아이들이 격차에 눌리지 말고, 내가 가진 ‘남과의 차이’를 바르고 밝게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빌어본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들의 지혜가 빛을 발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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