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한국의 여러 요소가 인기를 얻고 있는 덕분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 나라 사이에서 어떤 것을 놓고 ‘국적’ 논쟁이 펼쳐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에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다행스럽게 여기는 내용의 글이 언론이며 SNS에 자주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것(아무래도 땅 정도가 될 것 같다)을 제외하고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많으니 우리 것이 되는 기준을 시간 영역으로 한정한다고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이 될지 고민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 그리고 전통문화 영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는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떠했을까. 생경하기 그지없는 승려들의 깎은 머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더구나 불교를 전하기 위해 들어온 승려가 외국인이었다면 조금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서 아기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아두’ 혹은 ‘아도’로 불렀으며, 얼굴이 검은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묵호자’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고구려와 백제는 왕실의 지원 속에서 무난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신라는 꽤 고통스럽고 어려운 과정을 겪은 뒤에 법흥왕 때 비로소 공인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렇게 불교는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의 일부가 되었으니 불교라는 이름은 같아도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가까운 한국과 중국, 일본의 불교도 서로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 변화를 통해 적어도 ‘한국의 불교’가 될 가능성을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이며 백제는 그보다 12년 늦은 침류왕 때인 384년이다. 처음 불교를 보았을 때 사람들이 느꼈을 생경함은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졌고 16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원래 이 땅에 불교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시간의 변화를 불교와 관련된 몇 개의 유적을 살펴보며 이해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충청남도 서산이다.
‘한국 불교’ 이해할 수 있는 곳
서산 옆에는 당진이 있다. 당진은 지금은 지명이지만 예전에는 중국으로 가는 항구란 뜻을 가진 보통명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에도 가라쓰, 곧 당진이 있다. 그러므로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고자 했을 때 육지가 아닌 바닷길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부여에서 당진까지 갔으며 그 중간에 있는 서산을 지나갔다. 그런 서산에 백제 사람들은 안녕을 기원할 절을 지었다. 그리고 절 뒤의 바위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 이른바 ‘서산마애삼존불’이란 이름으로 익숙한 조각이다. 공식 이름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마애삼존불 가운데 오른쪽에 앉아있는 모습을 한 협시보살을 미륵보살로 상정할 때, 가운데 본존불은 석가여래, 왼쪽은 제화갈라보살로 볼 수 있다. <법화경>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이러한 불교의 분석과는 별개로 본존불의 화사하게 웃고 있는 얼굴 덕분에 ‘백제의 미소’로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실제로 본존불은 근엄한 부처님의 얼굴과는 거리가 있는 활짝 웃고 있는 모습으로 친근감을 더 한다. 아무래도 당시 백제 사람의 얼굴을 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그리고 빛의 방향에 따라 웃는 얼굴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씩 느낌이 달라진다. 또 좌우의 협시보살 역시 본존불 정도는 아니더라도 살짝 웃음기를 머금고 있어서 정겹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불상의 복식은 중국풍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얼굴은 다른 나라 불상에서 보기 어렵단다. 이러한 이유로 고고미술사학자인 김원용 선생은 본존불을 가리켜 ‘백제의 미소’로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곧 인도에서, 혹은 중국에서 들어온 불상의 도상이 있을 테지만 서산에 조각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분위기가 물씬 담긴 백제의 것이 되었다. 백제의 불교는 다시 성왕 때 일본으로 전해졌으니 여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음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백제 사람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 안의 요소들을 변화시켜 간 과정을 상상하는 것은 유익하다. 요즘 한국사를 볼 때 긴 한국사의 시간을 별다른 구분 없이 하나로 보려는 우리의 안이함을 벗어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이 삼국시대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다음 시기, 곧 고려의 불교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주는 공간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에서 계속을 따라 1km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는 보원사지이다. 지금은 빈 절터이지만 백제 때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통일신라 때 만든 당간지주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있던 절의 내력이 오래됐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이 남긴 기록을 보면 보원사는 통일신라 시대 화엄 10찰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법인국사 탄문이 머물던 시절인 고려 초기에 거창한 규모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절터를 보면 법당 터, 그리고 잘생긴 5층 석탑을 통해 절의 중심 영역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위쪽으로는 법인국사의 승탑과 승탑비 영역이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개울 너머에 당간지주와 돌로 만든 물통인 석조가 있어서 승려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면 가야산 자락이 둘러싸고 있는 제법 큰 규모의 영역이 한눈에 들어오니 대략 이 정도가 옛 보원사의 영역이었을 것 같다. 다만 조선 초기, 보원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 시기에 폐사가 된 것 같다. 최근에 보원사지에는 그 이름과 같은 조그마한 절이 들어섰으며 절터에서 발견된 석물을 한곳에 모아놓아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보원사는 그 전성기를 고려로 볼 수 있으니 더불어 고려의 불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고려는 건국 이후 태조가 훈요 10조에도 밝힌 것처럼 숭불정책을 펼쳤다. 이미 불교는 적어도 귀족, 왕실에게는 익숙한 존재였으리라. 때로는 불교의 권위에 기대기도 했으니 개경이 한양과 가장 다른 점, 혹은 만월대의 고려 궁궐이 경복궁과 분위기가 달랐던 것은 절과 승려의 존재 여부일 것이다. 고려에서 국사며 왕사의 존재는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광종 때 법인국사 탄문도 그중 한 명이다. 고려 태조는 왕후가 임신했을 때 탄문에게 순산을 기원하였고 무사히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광종이다. 이후 광종 때 국사, 왕사 제도가 정비되면서 탄문은 처음에는 왕사로, 나중에는 국사로 이름을 올렸다. 국사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려는 나라의 가르침으로 불교를 받들었으며 이를 통해 민심을 아우르고자 했던 의도를 볼 수 있다. 이제 적어도 고려에서 부처님, 스님이란 존재는 낯설지는 않지만 일반 백성에게는 여전히 높고 귀한 존재이기는 했을 것 같다.
시대별 불교의 위상 보여줘
이러한 불교가 갖고 있던 권위, 어쩌면 백성들에게 벽으로 느껴지던 불교가 가깝게 다가온 것은 의외로 조선시대에 나타났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에서 불교는 유교, 성리학과 달리 멀리해야 할 영역이었다. 물론 왕실이며, 양반이라고 모두 불교를 멀리한 것은 아니지만, 국사와 왕사 제도를 폐지한 것처럼 나라에서 불교의 권위를 보장해주지 않았고 가볍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부녀, 혹은 평범한 백성들에게도 불교는 쉽게 다가왔다. 불교는 이제 낯설지도 높게 느껴지지도 않게 된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개심사가 그러한 느낌을 확인하는 곳이 될 것 같다. 개심사로 가는 길은 목장의 분위기로 인해 육지보다는 제주도의 풍광을 연상하게 한다. 개심사에 도착했음을 확인하는 것은 거창한 일주문이 아니라 개심사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세운 자그마한 두 개의 표석이다. ‘세심동 개심사’ 곧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동네에 있는 마음을 여는 절’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글인데 그 분위기며 말뜻이 정겹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계단을 올라가는 길은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올라가니 한적한 오솔길의 분위기다. 계단이 이어지며 숨이 찰 무렵 보이는 나무다리가 있는 연못과 ‘상왕산 개심사’란 편액이 적힌 안양루가 보이면 개심사 중심 영역에 도착한 것이다.
개심사도 백제 때 혜감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 절의 건축물은 조선시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여느 사찰처럼 산에 기대고 있는 산지 가람으로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심검당, 무량수전, 안양루가 작은 마당을 두고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그 옆쪽으로 이어진 공간에 지옥을 상징하는 명부전,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 있다.
개심사 대웅보전은 조선 초기인 성종 때 지은 건물로 고려 때 유행하던 주심포계 건물이 조선시대 유행한 다포계 건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큰 규모의 건물은 아니지만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건축 기법이 엄정해서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또한 지붕 위에는 기와와 서까래를 고정하는 못을 가리기 위해 만든 백자 연꽃 봉오리가 있다. 개심사를 포함해서 네 곳에서만 발견될 정도로 특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심사에서 대웅보전보다 눈에 띄는 것은 심검당과 안양루이다. 기둥의 모습은 나무 그대로의 모양을 써서 자연스럽고 또 편안하게 느껴진다. 대웅보전 오른쪽으로 난 길로 올라가면 보이는 산신각은 그 자체의 분위기도 좋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절의 모습도 좋다. 무엇보다 개심사를 답사하는 동안 우리 자연과 잘 어울리는 건축물, 그리고 건축물의 기둥을 보면서 ‘한국 건축’ 혹은 ‘한국 불교’라는 낱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처럼 서산의 불교 유적은 각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각각의 유적을 연결해서 살펴보면 처음엔 낯설었을 불교가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연스럽게 우리 것의 ‘시효’에 대해 고민하게 되며 그 ‘지위’를 규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다시 몇백 년이 지났을 때 지금 우리 옆에 있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 것’의 이름을 얻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