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은 가을 공주장에서 쪽마늘씨를 사서 텃밭에 심었다. 한 겨울을 지내고 마늘대가 누렇게 되어 쓰러졌다. 쑥쑥뽑아 단단히 영근 마늘을 흐뭇하게 보았다. 가위를 들고 톡톡 마늘대에서 잘라내니 복숭아만한 마늘, 자두만한 마늘, 방울토마토만한 마늘 180개가 나왔다. 40개는 종자로 남겨 둘 것이다. 200개를 목표로 한다. 햇볕 좋은 곳에 널어놓고 여유가 될 때마다 30개 정도 집어들고 집으로 온다.
지루한 일을 할 때 늘 하던 대로 해야할 일 준비물을 가지고 소파에 앉아 TV를 튼다. ‘드라마 몰아보기’. 스텐바가지에 흙묻은 통마늘을 넣고 과도를 들고 통마늘을 하나하나 쪽을 내어 껍질을 벗겨 빈바구니에 떨어트린다. ‘툭’, 작지만 옹골찬 소리. 내 손으로 키운 까닭으로 소리하나에도 흐뭇하다. 싱싱함을 보여주듯 물에 담구지 않아도 껍질이 잘 벗어진다.
TV에서는 지독히 운없이 태어났고 골골이 삶을 무너뜨리는 장애물로 고생하지만 뒷골목이 아닌 트인 앞세상에서 건강하게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가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실존인물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였단다.
마늘 한 통을 들고 껍질을 벗기며 ‘지금 저 내용은 실존이 아닌 극적 재미로 넣었을 거야’, ‘지금 저 내용은 정말 주인공이 실제로 겪은 일일거야’ 등 마늘과의 대화가 한창이다.
‘정말로 사람의 일생에는 정해진 운이 있나?’ ‘예전에는 신데렐라 여성 이야기가 주된 드라마 내용이었는데 재벌 아들이 경제력, 지위 다 평범하지만 당찬 아가씨를 찾아다니는 이야기가 많네. 흥, 저것은 그냥 드라마야. 신데렐라는 문자로 기록된 9세기 이전부터 구전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진화되어왔는데 독립적이고 당당하게 신데렐라를 거부한다. ‘워라벨을 중시하는 세대에선 있을 수 있겠어. 겉보기 화려함보다는 자기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만족하는 삶을 추구할 수도 있지’ 마늘 5통이 벗겨져 반달모양의 쪽마늘로 바구니 속에 들어앉아 있다. 부드러운 미색의 윤기나는 쪽마늘들.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로는 21세기, 30세기가 되더라도 신데렐라는 지속되지 않을까? 사람의 본능은 화려함, 힘, 성공을 따르니까. 다만 한국식 남성 신데렐라형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도 많아지겠네’ ‘저 드라마는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요소를 죄다 모아놓았어. 게임, 폭력, 의리, 그리고 성스럽고 고요한 종교와 아이들, 그리고 흥미로운 미국의 한 문화, 일본어’ 머리와 눈과 손이 각기 제 기능을 다하는 사이 또 마늘 5통이 단단한 쪽마늘로 바구니 속에 들어앉았다.
‘드라마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버지의 사업이라 계승해야 할 사람들도 고민이 있겠다. 끊임없이 아이디어 짜내야 하고 사람관리해야 하고, 라이벌과 경쟁해야 하고, 정보찾아야 하고, 사람들 만나 부탁해야 하고. 하긴 유전자가 있으니 그 쪽이 발달하겠지. 그렇지만 아버지가 사업가라 해서 반드시 자손이 그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나는 것도 아닐 수 있다. 아버지의 사업에 전혀 관심없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있으니.’ 또 다시 마늘 5통이 알알의 쪽이 되어 바가지 속으로 들어갔다.
‘저 드라마는 예산을 절감하느라 제작진이 무척 고심했을 거야. 화려해야 할 곳이 너무 밋밋해. 같은 장소에 같은 춤만 반복해. 요새는 한국 콘텐츠의 힘을 아는 국내외 자본들의 요청도 많고 재능을 비교적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도 달라졌는데 당시에는 고생했겠네.’ ‘어 저 곳은 내가 다녀온 곳이네. 마카오.’ 다시 마늘 5통이 쪽으로 정리되어 바가지 속으로 톡톡톡 떨어졌다.
어느 새 20통이 쪽으로 분리되었다. 단순반복되는 일을 할 때 재미있는 드라마는 지루함을 잊고 일을 하는 지도 모르게 눈과 손을 움직이게 한다. 다만 너무 앉아있는 것이 문제이다. 마늘 벗기며 중간중간 널어놓은 빨래를 정리하는 일, 방방에 창문 여닫기, 물 한잔 마시기 등으로 일어서서 걸어야 겠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보니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분명히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신은 어디까지 담당하는가. 잠재력까지만 주되 장애물에 굴복하지 말고 노력해야 하는 일은 개개인의 몫인가. 장애물에 주저앉지않고 나가는 의지까지 신의 몫인가. 장애물은 보다 강하게 하려는 신의 계획인가.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기운 빠지는 일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를 믿는 것이 좋겠다. ‘스스로 돕는 노력’이 신이 존재하심의 증거이다.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프뢰벨은 세상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인간에 있어 스스로 무엇인가 하려는 노력이 신의 숨결이다. 다만 그 크기가 한 홉인지, 한 되인지, 한 말인지를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일 듯하다. 무거운 주제를 생각하는 사이 마늘 10통은 모두 각각의 쪽으로 정리되어 바가지 속에 이미 들어가 있다.
드라마에는 인간사와 당대의 관습, 생활양식, 가치관, 언어 등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일본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베네딕트는 일본 드라마, 미국 내 일본 공동체들을 살펴보고 ‘국화와 칼’이라는 고전적 일본문화 이해서를 저술하였다. 정리된 마늘은 고기에 곁들이든지, 국에 넣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건강하게 할 것이다. 한 통의 마늘을 쪽으로 정리하는 단순한 일거리는 드라마를 불러오고 덕택에 이러저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