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어느 시대나 사회에서에서도 그랬듯이, 특정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살았던 시대가 가장 어렵고 혹독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교육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매 시대마다 교육의 위기가 거론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 학교 교육도 여전히 위기상황으로 회자되고 있다. 교육의 변화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실제로 우리 교육계 내외에서는 1990년을 전후하여 공교육에 대한 문제와 비판이 제기되다가, 90년대 말부터 공교육에 대한 우려와 자성이 본격화되면서 ‘교실이 무너지고 있다(교실붕괴)’, ‘교육은 없다’, ‘학교붕괴’ 등과 같은 과격한 표현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매스컴에서는 왕따, 학교폭력, 기초학력 저하, 교실붕괴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공교육의 위기를 지적했다. 특히 학생들이 학교를 싫어하는 이유로는 첫째 수업이 재미없고, 둘째 지나치게 엄격하고 획일적인 틀 속에 학생들을 가두고 있으며, 셋째 성적으로 줄을 세워 차별하고, 넷째 가르치는 것에 속도감도 없고 참신함이 없으며, 다섯째 시대낙후적인 교육내용과 방법을 강요하고, 여섯째 배울 의욕이 없는 아이들조차 학교가 무리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인 것 등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은 여전
현대사회가 도전받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아마도 비인간화 현상이라는 문제일 것이다. 즉, 현대사회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인간성이 점차로 마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타인을 하나의 인격적 주체로 대하는 데 점점 더 인색해지고 있다. 인간화 교육은 인간적인 교사에 의해 이뤄진다 더 큰 문제는 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에 교육이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의 본래적 사명이 ‘사람임(Menschsein)’을 ‘사람됨(Menschwerden)’으로 이끄는 일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교육현상은 미래사회를 더욱더 불투명하게 하는 촉진요인이 될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교육에 대한 인간주의적인 접근은 꾸준히 고조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교사와 학생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인간학적 접근’을 강조하는 경향이 돋보인다. 이러한 관계가 자주 교육 문제로 부각되는 이유는 학생의 인간성(사람됨)은 인간적인 교사의 인간적인 교육방법에 의해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교육내용이 아무리 인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성이 결여된 교사에 의해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르쳐진다면 학생들은 결국 비인간적인 ‘어떤 것’을 학습하게 된다. 그러기에 교사와 학
최근 국내외의 조사 결과들을 보면 한국의 국민행복지수는 OECD 34개 회원국 중 33 위로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고, 자살률 또한 OECD 국가 중 10여 년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도 2009년 첫 조사 이후, 한 해를 제외하고는 OECD 국가들 중 최하위이다(연세대사회발전연구소, 2016). 이처럼 국내외에서 매년 발표되는 청소년 및 성인들의 행복지수와 자살률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니까 자살률도 그만큼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청소년은 왜 자신의 삶에 대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까? 기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열 심히 살아가는 이유도 행복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의 청소년들은 성적이 행복 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척도인양 성적 올리기에 매달리는 입시 위주의 교육풍 토 하에서 삶의 여유를 상실한 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통계청의 보고서에 의하면 청소년 자살의 주된 원인은 성적 및 진학 문제(39.2%)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초·중학생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화목한 가정’을 원하고 있으며, ‘행복하지 않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흔히 포스트모던 사회라고도 한다. 그 이전의 사회를 근대사회라고 하며, 그 이전의 사회를 전근대사회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는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거쳐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사회로 이행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의 특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전근대사회는 한마디로 마술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사회이다. 즉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은 세계가 정령(精靈)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근대사회는 한마디로 이성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사회이다. 모더니즘의 사회가 등장하면서 근대 합리주의가 가장 먼저 해체해 버린 것이 이러한 마술적 세계관이었다. 모더니즘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성의 힘으로 도깨비의 정체를 밝혀내고, 우주선을 달에 보내 계수나무와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는 등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함으로써 ‘탈(脫) 마술화’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태도에 대해 부정적이다. 과연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이성에 의해서 제어되고 해명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영국의 한 용병이 미얀마 전투에 참가하여 전투 도중 실종되었다. 얼마 뒤 실종 6개월 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