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이다. 그래서 거침없이 '좋다, 싫다'를 말로 표현한다. 그래서 학교 수업 과목이나 가르치는 선생님도 좋다, 싫다를 이야기 하는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의무교육 단계인 중학교 과정에서 가르쳐야 할 과목을 좋아한다면 다행이지만 싫다고 공부를 안 한다면 어떻게 대처하여야 될까?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요구되고 있다. 학력면에서 국가가 정한 최소한도 기초학력 수준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교육과정을 정하고 이를 학교에서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떤 과목을 싫다고 해서 교사가 이를 포기하는 것은 가르치는 의미를 잘 못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관계, 세일즈, 교육 등 어떤 분야에서건 설득의 달인들은 언제나 "NO"라는 답을 예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한 다음,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육의 어려움은 수준 차이가 있는 아이들이 있을 때, 한명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이끌어 가는 일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말만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가르치지 않고는 설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교사에게는 지식 분야의 전문성보다는 아이들이
수업은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요즈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소통이 어려워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왜 어려워졌는가? 시대가 급변하면서 교사의 권위가 약화된데 기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지식 측면에서 학부모의 평균 지식수준보다 교사의 지식 수준이 높았었다. 그리고 IT 기술 등 아이들이 더 빨리 세상을 이해하는데 교사만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교육과정 내용이 시대의 변화를 앞서지 못하고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에 아이들은 수업에서 더 멀어져 가는 경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지금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너무나 많은 학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들을 단지 교실 속의 교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이들은 시험을 치르면 좋은 점수를 얻기 기대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기대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절망이 따른다. 이때 교사의 "그래 넌 잘 할수 있어, 수업시간에 집중하면 다음에는 잘 할수 있을거야!"라는 따뜻한 한마디는 학생에게 어려움에 처한 장수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될 것이다. 필자가 가르친 한 학생은 교사의 용기를 북돋
학교는 한마디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곳이다. 이 교육과정을 조금 세분하여 보면 그 중심에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할 교과목이자리잡고 있다. 학생들에게 이 교과는 개인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교사를 통한 학습경험을 통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중학교부터는 모든 과목을 교과별로 전담 교사가 담당하게 되므로 교과와 학생과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 그런데 사회라는 교과는 일반적으로 입시에서 최상의 중요도를 가진 과목이 아니기에 중학교 과정에서 잘 못 접근하면 암기과목으로만 생각하여 외우기를 싫어하는 학생에게는 멀어져 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중심에서 교사가 교과목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아이들의 반응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14년 전 내가 가르쳤던 S학생은 아래와 같은 반응을 글로 적고 있다. "사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사회과목을 못했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와서 김광섭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난 뒤부터는 사회 성적이 많이 좋아졌다. 1학년 때 한번 시험을 못 봐서 매일 매일 공부를 해서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것을 쓰고 외우고 할 때는 선생님이 밉고 정말로 싫었지만, 그렇게 공부한 뒤 본 시험에서 성적이 많이 올
우리 자녀는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야할 존재이다. 사실 떠나보낸다는 것은 자녀가 혼자 독립할 때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부모가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우리 부모들은 자녀가 홀로 서야한다는 것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권인 일본,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키코모리가 있다. 이들은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취직도, 결혼도 마다하고 사회와 연을 끊고 집에만 틀어 박혀 사는 일본의 젊은이들로, 약 300만 명이 넘는 숫자이다. 이러한 문제는 일본의 장래와도 연결될 것이다. 중국에서도 엄격한 산아제한 정책으로 한 가정에서 한 자녀만 낳다보니 이들에게 지나친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어 소황제처럼 자라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학자 루소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자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라고 말한바 있다. 자녀가 먼 훗날 멀리 비상하길 바란다면, 지금부터 그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살
교육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교육의 목표로 전인교육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몇몇 대학의 진학 결과를 학교교육의 성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진로교육만큼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와 갈등이 많은 교육정책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다시 진로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러나 이보다 더 강조해야 할 사람은 직접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닐까? 왜냐하면 20, 30년 후에 그 책임을 묻는다면 정부일 수도 있지만 직접 가르쳐 준 사람이 아닐까? 이는 질병 치료를 잘 못햇을 경우 병원장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를 비난하는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직접 가르치는 자의 책임은 막중하다 할 것이다. 지금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매우 행복하지 못하다는 통계가 연일 나오고 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학업 때문에라는 항목이 선두를 가고 있다. 그 증거로 해마다 130여 명의 학생들이 자살하고 있으며 33만 명의 고위기 학생이 보살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 성적은 세계 최고임에도 학습 동기나 흥미 수준은 OECD 평균 이하라면 깊이 고민해야 할 상황이다. 이처럼 난마와 같이 얽힌 우리 교
우리의 정치는 지금 어디 와 있는가. 민주주의는 이미 타락해 포퓰리즘 늪에 빠져 있다. 정치인들은 누구도 미래를 말하고 있지 않다. 표를 의식하여 현재의 달콤함과 편리함만을 부추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부정한 방법으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진출하려는 사람들도 우리의 심정을 매우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이 심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제는 어떤가? 가진 자는 더 탐욕을 부리고, 없는 자는 시기와 질투에 매여 있다. 윤리는 어떤가? 이 나라에서 정중함과 예의 바름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저속함과 뻔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반듯한 사람은 왕따가 되고 삐딱하게 꼬인 인간은 박수를 받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정신으로 건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가? 역사에서 그런 예는 없다. 로마의 몰락은 로마 시민의 타락에서, 유럽의 쇠퇴는 이성을 따라가던 유럽 정신의 쇠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른들이 밭에 일하러 간 사이에 동네 아이들은 요술피리 소리에 홀려 그들을 쫓아 갔다. 우리 기성세대가 물질의 풍요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간 사이에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엉뚱한 사람들이 빼앗아 갔다. 피리 소리에
일본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예전에는 ‘가깝고도 먼 나라’로 수식되었다. 그러던 일본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지리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한류 가수 이름이 일본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문화의 교류가 확장되고 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변화라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에게 숙명적인 이웃이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 만화·영화·드라마·음악 등 일본의 다양한 문화 콘텐트가 젊은이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한국에 스며들었다. 이제 한국에서도 케이블 TV에서 일본 드라마를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인터넷에서도 일본 후지TV의 애니메이션을 실시간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일본 문화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젊은이들이 주로 모이는 홍익대,·이태원 등지에는 종업원들이 “이랏샤이마세~”라고 인사하는 라면집과 일식주점에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도 몰라보게 돌려 놓고 있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44.3%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2008년에 비해 22.3%
미래의 직업환경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삶의 방식은 새로운 변화에 따른 도적에 직면하고 있다.과거 산업사회는 한두 명 똑똑한 사람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 조직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고도의 지식 정보화 시대인 지금은 연결망를 형성한 직업 생태계의 상호 협력과 소통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성과를 창출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이다. 모바일 인터넷- 포스트 PC 시대가 이를 더욱 촉진하고 있다. 개인의 전문성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일지라도 더불어 일하면서 살아갈 사람이 없다면 가진 전문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띠리서 서비스나 산업이 컨버전스된다고 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21세기 삶의 방식은 어느 분야에 전문성을 갖춰 하나만 잘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을 섞거나 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지식통합형 인재, 어떤 분야의 전문성은 물론, 타 분야의 경험 혹은 지식도 갖춘 컨버전스형 인재가 필요한 시대이다. 이같은 시대에서 생존의 필수 요소인 경쟁력이 요구된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협력이라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런 협력을 이끌어 내는 힘이 바로 인성이다. 교육분야에도 이같은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자연은 지금 물이 올라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향연 속에서도 그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지 못하고 학업때문에 대학생들이, 폭력때문에 중고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마음이 아픈 사람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다. 그런가하면 세계는 지금 교통 통신의 급진적인 발달로 지구촌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앞으로 우리가 살 길은 밖으로 나가는 것밖에 없다. 나라를 위해서도 그렇고 개인을 위해서도 그렇다. 지금 중국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자원 부국인 소련이 가까운 곳에.. 국제무대에서 한국인들은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유럽·미국 등 안정된 지역에서만 일하려 하고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국내에만 안주하려는 생각을 깨야 더 많은 한국인들이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다. 국제무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배경이 다른 외국인들과 스스럼 없이 일하고, 상대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이를 일상의 업무와 의사 결정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2011년 한 언론사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돈과 행복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7.2%로 10개 조사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고 한다. 즉, 나머지 92%의 사람들은 돈과 행복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또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직업 선택 시 고려 요소 1위는 수입 33.2%, 2위는 안정성 30%로 나타났다. 이들 내용에 해당하는 적성, 흥미, 보람, 자아 성취를 고려해 직업을 고른다는 비율은 각각 11.8%와 10.9% 수준에 그쳤다. 또 한국고용정보원이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동일한 답이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적인 가치가 성공과 행복의 최우선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돈, 소비, 권력 그리고 높은 예상 수명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충분 조건이 결코 아니다. 경제학자들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50년대를 기준으로 미국의 생활 수준은 현재 2배 상승했지만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은 50년 동안 정체 상태
우리 나라 아이들의 특징은 다른 나라 학생과 비교하여 공부하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글만 깨우치면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현상은 학교 다닐 때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과외 수업을 받으러 간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이들 성적은 향상되지 않는다. 아이도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만, 성적은 제자리고 이를 지켜본 학부모도 아이들 자신도 답답하다. 그러니 불안하기 그지 없다. 이러한 원인은 자기주도의 학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학습에서 학(學)만 있고, 습(習)이 없다. 많이 배우면 학생은 학습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같은 생각이 사고 시스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뇌는 뇌간, 대뇌변연계, 대뇌신피질의 3중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뇌 과학자들의 주장이다. 우리의 두뇌는 생명을 주관하는 뇌간에 최우선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다음으로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의 욕구를 충족시킨 후에 비로소 인간적인 특성인 지성, 이성, 사고, 언어 등을 관할하는 대뇌신피질에 에너지가 공급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학습은 지적인 능력으로만 이루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운다. 그 가운에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학교에서 장애인의 날을 맞이하여 영상을 통한 장애 이해교육을 실시하였다. 영상교육은 현실로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가까이 접하게 할 수 있어 이해에 도움이 된다. 1학년김수민,김소영 학생은이 수업을 듣기 전엔 정말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많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여 그 내용을 전하고자 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도 조금 부족하고 모자란 친구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런 애들을 볼 때 마다 짜증났고 지켜웠다. 그런 나의 생각 때문에 그런 애들은 더욱 더 나쁜 길에 빠지게 되었고 5학년 때는 그 아이가 내 물건까지 훔친 경우도 일어나서 그 이후로 그런 애들을 자꾸만 차별하게 되었고 뒷담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수업을 듣는 것이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지금까지 내가 했던 행동이 정말 부끄러웠고 내 자신이 한심하게까지 했다. 사실 나도 눈이 안 좋고 안경까지 쓰니 시각장애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차별받지 않았고
요즘 현대인은 공부와 인격의 연결 밀접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공부를 잘 해서 연구 실적이 높은 학자가 모두 훌륭한 인격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예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고 있다. 논문을 표절하여 문제가 생긴 정치 지도자나 고위 공직자의 일탈 행동은 더욱 많은 공부를 하였지만 신뢰하기 어렵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자가 제시한 ‘공부를 하면 풍요로운 인격이 길러진다’라는 가설은 한번 믿어도 손해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정리하는 방법을 공부에서 발견함으로써 마음도 인생도 모두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흥미를 붙여 공부를 시작하면 그 분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과거의 자신보다 훨씬 마음이 풍요로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이상, 기왕에 멋지게 살아갈 생각을 해 본다면 그런 지적인 흥분을 느끼는 쪽의 인생이 더욱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공부를 하는 것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특히 고전에는 분야와 상관없이 현대를 살아가는 선배들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 입구가 어디든 그로부터 고전으로 소급하여 공부하면 대단히 의미 있는 시간을
20일 오후 광양여중 덕모관에서 새학년 스카우트 신입 대원 선서식이 있었다. 대원 45명은 각자 손에 촛불을 들고 입장하여 모닥불에 촛불을 점화시킴으로 의식이 시작되었다. 작은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가며 우리의 앞길을 밝히듯 여러분도 몸과 마음을 바쳐 우리 겨례의 앞날을 밝혀 줄것을 제 322대 배태진 대장은 강조하였다. 스카우트 선서식은 스카우트 명예와 규율을 마음에 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사이다. 요즈음 학교 폭력 등 학교 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언어는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부모는 일에 바쁘고 시회는 무관심하고 그런가 하면 선생님들도 자기가 담당한 교과지식을 가르치기에 바쁜 세상이다. 따라서 청소년의 마음을 움직을 생명의 언어가 고갈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스카우트에 가입하여, 올바른 대원 생활을 하면 요즘 이야기 하는 통합교육을 제대로 받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리더십을 갖춰 미래를 이끌어 갈 지도자로 성장할 것이다. 무엇보다 대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아직도 우리
학교 업무의 중심은 수업이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교사라면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현장은 수업하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모두 선생님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반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업을 하다 보면 “자, 여길 보세요.” “여기가 특히 중요해요.”하고 주의를 촉구한다. 그렇지만 고개를 숙이고 지우개를 갖고 노는 아이, 뒤에 앉은 아이와 잡담하는 아이,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칠판을 주시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나랑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이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교사는 ‘선생님은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는데 열의를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다’ 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수업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아 진도가 늦어지면 초조해지고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럴 땐 울컥 화가 치밀어 “너, 학교에 뭐 하러 나오는 거야! 그렇게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 오지 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런 말을 할 때는 교사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가 아닐까? 그리고 감정이 목에까지 차오르며‘아이들 태도가 좋지 않아 큰일이야.’ 하고 책임을 전가하면서 교사 자신이 납득하려고 하는 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