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빠른 시간에 물질적으로 풍요함을 이루어냈다. 그 배경에는 엄청난 노동의 댓가가 있다. 빨리빨리 목표를 이루기에 급급하여 진정한 휴식을 놓치고 산 것이다. 정신의학에서는 휴식을 모르고 사는 성격을 '타입 A' 성격이라 부른다. 이런 사람은 야심차고 욕심이 많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전력 질주 한다.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다. 그래서 뜨거운 음식을 싫어한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벌컥 화가 치민다. 운전하다가 길이 막히면 혼자 욕도 많이 한다. 이 모습을 옆에 탄 아이들이 볼 수도 있다. 과속하고 끼어들기를 잘한다. 1분이라도 빨리 갈수만 있다면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기다리는 것은 질색이다. 은행이고 슈퍼마켓이고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못 참는다. 이런 사람들은 바쁘게 산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성격이 많다. 그러나 40대 이후를 조심해야 한다. 심근 경색이 잘 오기 때문이다. 돌연사의 위험이 높다. 성공은 했는데 심장 마비가 왔다면 이는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왜 느긋하게 쉴 수 없을까? 모두가 성격 때문이다. 왜 이런 성격이 되는가? 성격은 유년기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다. 특히 부모의 양육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저출산과 삶의 주거 환경 변화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찾아 이동하였고, 도시의 중심지도 새 개발 지역에 밀려 구도심은 버려진 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만이 아닌 대도시, 중소도시 구도심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농촌 지역도 아닌 서울에서 학생이 적어서 학교를 통폐합한다는 건 몇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역사가 깊은 교동초등학교는 올해 신입생이 서울 시내에서 가장 적은 21명에 불과했다. 120년 전 '관립교동왕실학교'로 문을 연 국내 최초의 근대식 초등 교육 기관인 교동초는 한때 매년 9백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신입생이 줄면서 이젠 전교생이 117명에 불과한 미니학교가 돼 통폐합을 걱정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주변이 상업지대이고, 주민이 선호하는 아파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 세대가 없어 아기들의 울음 소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입생 감소는 서울의 교동초 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출산으로 학생 수가 줄어든 데다 주거지역이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생긴 구도심 공동화 현상 때문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지방 중소도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의 대부분은 어떤 조건 즉, 부자가 되면 그때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박사가 되면,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면 그때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싶어진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런 사람의 묘비에는 ‘내일이면 행복할 사람 여기 잠들다’라고 써진다. 진정한 행복은 목적이 아니고 과정이다. 오늘 내 곁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Be happy!’ 이것이 행복 지수를 높이는 길이다. 살다 보면 때로 이유 모르게 불안할 때도 있고 기분이 쓸쓸할 때도 있다. 사소한 일에 분노가 치밀 때도 가끔 있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다. "항상 쫓기는 듯 바쁘고, 죄책감으로 우울하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이 들고 질투심으로 괴롭다."는 분들이 많다. 인간 실존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기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유난히 이런 심리가 심한 사람은 자기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마음의 관리가 필요하다. 이런 삶을살다가 우울증, 정신병에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빵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행복을
11일 오후 2시부터 구례교육지원청주관(교육장 정봉호)으로교직원과 학부모를 위한 교육강좌가 열렸다. 강사로 '지혜의 심리학'을 쓴 김경일 교수(아주대심리학과)가 가 '우리 아이 심리 읽기'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 김경일 강사는 "세상은 앞으로 어떤 사람을 인재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말문을 열면서 지금까지는 지식, 자격증, 높은 성적과 점수를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1라운드 통과용이라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타인과 융화할 수 있는 사람, 지식을 융합할 수 있는 사람, 감수성을 통해 통찰을 이끌어 내는 사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 동기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아이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동기의 이해를 통한 잠재력 찾기가 매우 중요하다면서, 20년 후 살아남는 자들의 모습을 보고, 사실 마음이란 신의 영역에 해당한다며 관점의 작동방식을 통해서 아이들의 미래와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인지적 구두쇠로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기에 아이들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길은 쉽지 가 않다. 다음은 고착성으로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서 꿈쩍도 안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후회와 만족을 동일시하는 착각에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한결같이 내 아이만이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 쉽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춘기 자녀는 '내 아이가 아니라 손님'이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이들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사춘기 아이들은 지도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이런 사춘기 자녀를 대하는 방식은 무엇보다 자식을 존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해 주라는 것이다. 자녀 자신이 '내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확신을 마음에 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는 자존감(self-perception)의 기초가 된다. 아이들은 단순히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믿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때로는 부모의 바쁜 생활과 피로감이 자녀에게 상처를 준다. 삶에서 우선 순위를 정해서 시간배분을 지혜롭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중요한 요소는 가족끼리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족 중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놀리거나 콤플렉스를 지적하는 것은 안 된다. 이야기 하는 방식이 누구를 질책하기 보다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추석 명절이 지나면서 여성들이 피로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접대하느라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시간이 가면 해결된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니까. 그러나 늘 피곤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있다. 자신감도 없고 살맛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디 보니 입맛도 없고 잠도 깊이 들 수 없다. 성욕도 없고, 재미있는 일도 보이지 않는다. 쉬어 보고 잠을 원 없이 자 봐도 몸은 피곤하기만 하다. 이를 정신의학에서는 가성 피곤이라 부른다.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도 이럴 수 있다. 돈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에 빠져있으면 스스로 너무 억울하다. 한마디로 정신력이 바닥난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빠진다. 정신력의 누수 현상을 막는 길은 없는가이다. 정신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주된 것은 인생의 스트레스이다. 인간의 주된 스트레스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방은 ‘포기를 잘 하라‘이다. 두 번째로 많은 스트레스는 미움이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미움 받는 것 보다 더 큰 스트레스다. 그래서 처방은 ‘용서하라이다. 미움은 병을 만든다.’이다. 분노는 자율 신경을 자극해서 갖가지 병을 만든다. 억울한 일
오늘도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지적과 질책을 하기 쉽다. 어른이 아이에게, 상사가 부하에게 더 그러기 쉽다. 그런데 그 질책과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미국 워싱턴대 심리학과 엘마 게이츠 교수는 분노의 침전물이라는 실험을 했다. 욕하고 화를 내는 사람의 침과 웃으면서 나오는 침을 모아서 실험용 쥐에게 투입하는 실험으로, 화를 낸 사람의 침을 주입받은 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니 그 위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말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일종의 행동이다. 거친 말은 다른 사람에게 주먹을 날리는 행위이다.”라는 영국의 철학자 오스틴(J. L.Austin)의 말처럼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은유하는 실험이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횡행하는 곳은 우리 아이들이 생활하는 학교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 말이 넘쳐야 하는 곳이지만, 우리 교육현장의 언어 오염은 매우 심각하다. 학생들만 있는 2시간 동안 고등학교 교실을 관찰해 욕 사용 빈도를 기록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평균 26초에 한 번꼴로 욕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11초마다 욕을
회사가 사원을 뽑으면 신임 직원에게 좋은 사원이 될 수 있도록 교육을 실시한다. 직급과 상관없이 `新(신)`이란 말은 늘 신선하다. 경기가 안 좋다보니 요즘 일부에서 `임원은 임시직원`이라며 승진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조직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여전히 기쁜 일이다. `신임` 임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말년` 교육과 분위기가 천양지차다. 분위기부터가 초롱초롱, 돌이라도 씹어 먹을 듯하게 학습 분위기가 하늘을 찌른다. 반면에 `말년 퇴직자` 교육은 말 그대로 의기소침, 심드렁 그 자체다. "청춘을 바쳐 일했는데, 이젠 퇴물 취급"이라며 쓴 눈물을 흘릴 자세이다. 조직에서 노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일까. 마지막 1년을 앞두고 학교를 옮겼따. 조금 덜 후회하기 위하여 지금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 같은가. 가야할 길 아직은 준비가 부족한 느낌이다. 신임 임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은 "제일 먼저 퇴임사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회사를 그만둘 때 당신은 어떤 퇴임사를 준비할 것인가, 나는 어떤 리더로 평가받을 것인가, 나의 퇴임식은 어떤 풍경일 것인가를 생각해보란 부탁이다. 그리고 그런 리더가 되기 위해 지금부터 어떤 행동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오늘은 우리 국민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추석명절이다. 거리에는 오가는 자동차로 붐비고 있다. 서울은 텅비어 있고 고향을 찾아 온 귀성객의 서울로 향하는 자동차 행렬은 끝이 안보일 정도이다. 이맘때 쯤이면 불현듯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사람의 인연은 안부에 의해 지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명절이지만 이산가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도 가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고달픈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때 따뜻한 당신의 안부전화 한 통이 꺾어진 누군가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부는 단순한 송신의 의미를 넘어 살아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마음의 수신호라 생각된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40여년 전 가르친 제자가 명절에 보내는 안부는 다시 한번 나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토록 잊지 않고 물어오는 제자를 향하여 감사하다는 응대 외에는 없는 것 같다. 물어오는 내용은 요즘 어떻게 사시는지, 애들은 건강한지 등 다양하다. 물론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안부를 묻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으니 힘내라는 무언의 응원과 격려가 안부의 목적일 것이다. 지금은
최근 여러 분야의 인재를 선발하는데 오디션이 유행을 타고 있다. 특히 노래, 연기 등 기능적 우수자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더욱 그러하다. 대학에서도 연극과를 가는 과정에서 실기시험을 본다. 이 과정에 대게 길어야 1분에서 3분 사이에 그 사람의 역량이나 가능성을 평가한다. 보통 사람으로 짧은 시간에 판단하기에 그것이 너무 신기하다. 대학입시의 경우 '학생들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1분에서 3분이내에 학생들의 재능을 파악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외국에 있는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심사의원장으로 참여한 영국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인 웨인 이글링(Eagling)의 글을 보고 제가 '아하'하면서 수긍이 갔다. 왜냐하면 이 발레단 감독도 오디션 심사를 많이 보러 다녔는데 그때 탈락한 발레리나가 항의를 하러 왔는데,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고작 10분만 봐 놓고 내가 무용을 잘 하는지 평가할 수 있습니까? 나를 왜 떨어뜨렸습니까?" 그때 웨인 이글링(Eagling) 감독이 "나는 1분만 봐도 알수 있다. 음악이 흐르는 복도에서 당신이 들어오는 걸음걸이만으로도 나는 당신의 재능을 가늠할수 있습니다."라고.. 진정한 프로는 걷는 자세부터
추석 명절을 앞두고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아직도 우리 가슴엔 풀리지 않는 일이 남아 있다.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보내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아픔을 달래는 사람들이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팝페라 가수 임형주의 세월호 참사 헌정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의 애절한 가사가 마음에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지만 제자리 걸음이기에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판다. 모두를 슬프고 부끄럽게 한다. 마치 내 자신 안에는 ‘도망자 이준석 선장’이 없는지, 단 1명도 구조하지 못한 ‘무능 해경’은 없는지, 질타만 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그분’은 없는지를 묻는 듯하다. 침몰 마지막 순간에 천진한 학생들이 남긴 동영상을 보았다. 그들은 사고로 숨진 것이 아닌 것 같다. 책임을 묻자면 그 정도에 따라 선장 및 선원, 해경, 정부 당국, 선사, 언론 등 하나하나 차례로 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책임과 무능, 협잡과 적당주의를 용인하고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많은 시대가 갈구했던 염원이었다. 신(神)도 천국보다는 그런 꿈이 이뤄지는 땅을 바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기억에 상처로 남은 대형 인명 사고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과 간첩조작 사건, 용산 참사 그리고 세월호의 침몰…. 이같은 국가적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후속 조치들이 발표되지만 그때뿐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사건은 형태를 달리하여 되풀이 된다. 왜 이같은 일이 이렇게 반복되고 있을까? 계속되는 재난은 지도자의 무능이나 국민성 때문이 아니라 생각된다. 올라갈수록 권한은 커지지만 책임은 줄어드는 관료시스템 때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책임’을 의미하는 영어 ‘responsibility’는 ‘반응하다’의 ‘response’와 ‘능력’을 의미하는 ‘ability’의 합성어이다. 결국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말은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반응(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의미한다. 이런 어원적 의미에 비추어볼 때 책임을 지려면 뭔가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뭔가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촉수가
이 세상이 부조리한 현실로 가득하다. 불공정한 사회이다라고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높아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마음은 불끈 더워지는데 실제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을 것이다. 동지를 모아 혁명을 꿈꿔야 할까? 주먹 꼭 쥐고 거리로 뛰쳐나가야 할까? 과연 이 시대 혁명이란 가능한가? 바꾸고 싶다했는데 곧 주저앉고 만다. 바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질적 해결 방안이란 결코 쉽지가 않다. 패배주의의 악순환에 빠져들 뿐이다. 사회뿐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여기저기 속한 크고 작은 그룹 안에서, 변혁의 소망은 쉽게 무너져내린다. 그러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외치는 소리가 있다. 정말로? 미국 템플대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며 실천가로도 활약중인 제이슨 델 간디오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에서 장담한다. 변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그의 과격한(?) 주장은 2008년 책에 담겨 세상에 나왔지만, 놀랍게도 지금 지구 한쪽에선 혁명의 불길이 드높이 치솟고 있지 않은가. 그는 혁명의 가능성을 ‘수사학’에서 찾는다. 21세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총도 칼도 돌도 화염병도 아닌 ‘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꿈을 따라 가슴 뛰는 인생을 사는 사람과 남의 꿈을 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다. 전자는 비록 현실이 척박하고 힘들더라도 꿈의 힘으로 눈부신 미래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그러나 후자는 꿈을 향해 전진하면서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정말 가능할까?’라는 의심이 항상 자신의 머릿속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가슴에 품고 있는 꿈이 진짜 자신의 꿈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꿈의 주인이 되라고 충고한다. 이 말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꿈이 아닌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실현하고 싶은 꿈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진짜 꿈 없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을 수도 없다. 그 결과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만다. 선생님이란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하도록 설득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꿈이 없는데도 공부 잘 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꿈을 심어주었더니 공부 문제도 생활지도 문제도 술술 풀리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때문에 꿈을 강조하는 것이다. 꿈 전도사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의 저자 김수영. 지금은 누구보다 화려
현대는 '생각의 시대'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모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로댕(1840~1917)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유명한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마 턱을 괸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아마도 퀭한 눈은 꺼질 줄 모르는 액정을 향하고 다른 한 손은 관성적으로 스크롤을 내리고 있을 터다. 이미 인간의 기억과 계산 능력을 뛰어넘은 기기가 우리 모두의 손에 들려 있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란 칭찬이 더는 미덕이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이같은 시대에 우리의 두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거에도 생각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최근 김용규가 쓴 '생각의 시대'는 ‘생각’에 경쟁력이 있다고 말한다. ‘지식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이제 ‘생각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선언이다. 남과 다른 발상, 고정관념을 뒤집는 독창성, 나열된 지식의 이면을 꿰뚫는 혜안이 필요하다. 사실 여기까진 좀 뻔하다. 이미 정보화 시대에 ‘Think different!’가 경쟁력이란 것은 수 많은 사람들이 떠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생각을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