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8.16:00. 서울시 자양동에 위치한 어린이회관의 교육관 근화원에는 백발이 희끗거리는 신사들이 모여들었다. 건물 입구 벽에는 [환영합니다. 제16기 동창회 순천사범학교]라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유리창에도 같은 내용의 입간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었던 [순천사범학교 제 16기] 동창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었다.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은 이제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할머니 답지 않게 환한 웃음으로 서로 반기면서 정답게 손을 마주 잡기도 하고 남남끼리 또는 여자들끼리는 서로 부등켜안고 반기기도 하였다. 1960년4월에 국립 순천사범학교에 입학하여서 1963년 2월말에 졸업을 하고 나서, 곧장 교사로 발령이 나서 초등학교에 근무를 해오던 사람들이다. 물론 개중에는 일찍 교단을 떠나 다른 길로 진출했던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그러나 본래 사범학교의 목적에 맞게 교직을 지키다가 정년을 맞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모임이었다. 다만 아직도 현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남자가 3명 여자가 2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도 이제 내년 2월이나 8월말이면 교직에서 떠나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순천사범학교라는 이름이 교단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요즘 각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이면 거의 끝나겠지요. 이걸 진즉 알려 드렸어야 하는데 그만 조금 늦어 버렸나 봅니다. 그러나 10월 문화행사로 하는 학교들도 있으니, 참고로 안내를 드립니다. 운동회나 경축 행사를 하면서 만국기를 달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국기 게양대에서 사방으로 뻗쳐 나가는 빛살 형태들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양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보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보면 그냥 운동장 주변에만 있는 모습이 되고 말기 때문이죠. 이럴 때에 이 방법을 써보세요. 운동장 한 가운데서 8방 또는 10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만국기를 보면 모양도 좋고 언뜻 보면 이상하게도 보여서 꽤 좋아들 합니다. 만국기를 다는 방법은 사실 여러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서 더 편리합니다. ① 먼저 8호선 정도의 굵은 철사를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가장 높은 줄이 되도록 배치합니다. ② 철사를 늘어뜨려서 운동장 한 가운데 부분에 철사를 잡아 고리를 만듭니다. ③ 이 고리 부분에 만국기를 펼치고 싶은 만큼을 방향을 잡아 배치하고 모두 고리에 묶습니다. ④ 여기 한 가운데에 태극기를 세로로 달기하고, 풍선으로 장식을 하면
코끼리와 토끼가 힘 겨루기를 한다면 누가이길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상식적으로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경기도 고양시에서는 코끼리를 이긴 토끼가 나왔다는 기막힌 사연이 있어서 화제다. 제 13 회 고양 고양시학생체육대회에서는 이런 기막힌 결과가 나와서 모든 관계자들의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원중초등학교(교장 : 김성남)는 전교생 200명도 채 안 되는 10학급 짜리 작은 학교가 74학급 3,000여명의 학교부터 12학급의 학교까지 학생수가 더 많은 63개나 되는 모든 학교를 물리치고 고양시 전체 초등학교 71개교 중에서 당당히 종합 우승을 한 것이다. 고양시 전체 71학교 중에서 학생수가 많은 순서로는 끝에서 8번째 밖에 안 되는 10학급 198명의 고양 시내에서는 미니학교에 속하지만, 이번 고양시학생종합체육대회에서 종합 우승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이루어내게 된 데는 이렇게 소규모의 학교에서 어려운 여건을 마다하지 않고, 육상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온 학교 경영을 맡은 김성남 교장선생님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지원이 잘 되어도 어려울 결과를 가져온 데는 누구보다 더 애를 쓴
가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아니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심을 품고 산다는 것 자체가 멋지고 좋은 일이 아닌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느낄 수 잇는 시심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작은 거름이 될 것이 아닐까? 9월 12일 늦은 6시 40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당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다래웨딩부페에서는 작은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었다. 송병무 시인의 [오늘밤 그대의 꿈은]이라는 시집의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대부분의 출판기념회가 유명세를 치르는 유명인들의 잔치이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자랑하는 자리이기 쉽다. 그러나 어제 출판기념회를 치른 시인 송병무씨는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이나 유명세를 치를만한 사람이 아님은 물론,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그를 출판기념회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나의 취재원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 년 전쯤에 나는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노력을 하여 보자는 글에서 그를 [뒤늦게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여 키워나가는 사람의 본보기]로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는 현재 고양시 원당 농협중앙회 앞의 길가에 조그만 컨테이너 박스 속이 자신의 일터이다. 그 좁
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 왔다가는 어린이들을 보면 반드시 몇 학년이냐고 물어서 해당학년의 사회공부에 도음이 되는 곳을 꼭 찾아보도록 안내를 해준다. 예를 들어서 3,5학년의 경우 어린이 박물관을 보면 반드시 민속박물관의 제2관 생활관을 보게 하고 그것이 끝나면 야외전시장을 보게 안내한다. "저 담장 밑으로 나가시는 길에 잘 둘러 보시면 물레방아, 연자방아, 대장간, 너와집 등 교과서에서만 본 것들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꼭 보시고 가십시오." 내가 근무하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민속박물관에 자원봉사를 하면서 관리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정성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조그만 공간이라도 그냥 놀리거나 버려 두지 않는 알뜰함으로 박물관 안의 모든 시설들이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는 입구에 보면 건물의 바로 곁에 모래뿐인 폭 1m 정도의 공터가 길게 있다. 이 공터가 너무 흉해 보여서 집에서 기르던 붉은 들깨와 미모사(신경초) 모종을 20여 그루씩 가져다 심어 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비가 내리고 나서 가보니 이곳에 질경이를 잔뜩 심어 놓았다. 물론 신경초는 상당히 없어지고 몇 그루만 남았었다. 이 곳을 관리하시는 자원봉사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신경
2006년 8월 9일 저녁 9시 35분. 좀 늦은 시간인데 전화가 울리고 아내가 받아들더니, 얼른 송화기를 막고서 "여보 광주 선생님이신 것 같은데요."하면서 전화를 바꾸어 주었다. "자주 전화 드리지도 못한 제자에게 이렇게 친히 전화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하는 인사와 수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은사님은 "치우려던 월간 문학에서 자네 작품을 발견하고 다시 읽어보았네. 7월호를 치우려고 하다가 우연히 펴진 쪽에 바로 자네의 작품이었네. 난 시조 부분과 시 부분만 읽고 치우곤 하였는데, 덕분에 자네 작품을 읽게 되어서 전화했네."하시면서 "요즘 동화 작품에서는 전래 동화 같은 짜릿한 감동 감화를 주는 작품이 별로 없어, 자넨 동화를 쓰면서 무엇에다 기준을 두고 쓰는가? 다시 말해서 자네 동화의 문학정신 말일세."하시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런 질문이시고, 또 은사님의 말씀이라 함부로 답 할 수도 없는 그런 질문이었지만, 내가 평소에 가진 나름대로의 기본 정신이 있기에 서슴없이 "선생님, 제가 교직에 몸담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역시 동화란 [교육]을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문장이어야 하지만 바탕에 흐르는 정신은 가르침을 준다는
[아동문학과 효 사상]이란 주제로 24일과 25일에 걸쳐 제 36회 한국아동문학세미나가 열렸다. 남산골 옛 안기부자리에 새로 문을 연 [서울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세미나는 24일에는 우리 나라문단에서 가장 오랜 53차 정기총회가 열려서 정관개정과 새로운 임원선출 등이 있었다. 오늘 25일은 세미나가 열리는 날이다. 한국문인협회 신세훈이사장님이 친히 오셔서 끝까지 경청을 하시면서 함께 한 진지한 자리였다. 페막식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오늘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에 관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나는 주제 발표자로 [효 사상과 아동문학]이란 주제로 발표를 하면서 특히 효사상의 각 종교에서의 입장, 그리고 우리 나라 역사적 시대별 주요 효사상과 효자 이야기 등을 이야기 히였다. 마지막으로 현대적 효사상을 이야기 히였다. 효(孝)란 과연 지난날의 공,맹자 시대와 달라진 오늘날에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어느 정도를 효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단법인 [한국노인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이란 책에서 살펴보았던 현대사회에서의 효란 [현대적 사회생활을 하는 자식이 그 사회에 적응하여 가면서, 부모에게 봉양의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욕되게
오늘 오후 1시32분부터 KBS 1 Radio에서 전화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내용인즉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교사의 체벌 문제로 '체벌금지법 제정'에 대하여 교육부의 담당과장님과 대담을 하는 것었다. 그러나 대담 상대자는 의외로 전교조 선전부장인가 하는 분이었다. 나는 지난번 KBS 1Radio에서 열린토론에 나가서도 분명히 체벌 금지법만 제정하면 학교폭력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탁상공론이요, 교육현장을 모른 사람들이 안이한 생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건만 터지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발등의 불끄기 식의 졸속한 대응을 하고 있다. 진정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임시방편적인 대응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기 쉽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정리해 놓고 있다. 진정으로 체벌 없고 사랑을 감싸 안으면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학교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켜야할 기본 질서와 예절은 가르쳐야 하고,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대담에서 하고 싶은 말을 간추려 본 요점이다. 1
국립민속박물관의 정문을 들어서면 진입로의 오른 쪽에 나무들이 서있고, 그 밑에 우리 나라의 각종 들꽃들이 심어져 있다. 이 들꽃을 볼 수 있도록 사잇길이 나 있으니까 여름엔 시원한 오솔길 역할을 해준다. 야생초들이 심어진 오솔길의 뒤편에는 야외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다. 너와집이며, 물레방앗간, 디딜 방앗간, 농기구 같은 연장을 만들던 성냥간, 그리고 김칫독을 묻어 두고 겨우 내내 맛있는 김치를 먹게 해주었던 김칫간, 여름 무더위에 시원하게 낮잠을 즐기시던 원두막이며, 정자나무 그늘, 60년대 초까지 서울 거리를 달렸던 전차, 가을걷이를 한 곡식을 담아 주었던 벼 뒤주, 낟알을 찧어 내던 연자방아, 움집, 귀틀집 같은 것들을 초등학생들의 사회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다. 여기 야외 전시장에서는 이런 것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너와집은 나무의 껍질이나 나무를 얇게 켜서 기와 대신으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한다. 참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고, 산 속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이용하여, 산 속에서 구하기 힘든 기와 대신으로 이용한 집이다. 이 너와집은 두 가지 모양을 볼 수 있다. 움막집 형태의 너와집은 화전민들의 촌락에서 움막용으로 이
갯벌체험 ! 참으로 멋진 일이고 도시 사는 사람으로서는 당장 달려가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하는 신나는 일이다. 오늘 나는 휴가를 맞은 큰 아들네의 갯벌 체험에 함께 따라 가기로 하였다. 지난 초여름에 한 번 갔으나 시간에 쫓겨 제대로 잡아 보지도 못하고 왔었기에 이번만은 제대로 좀 해보고 싶었다. 사실 갯벌 체험장으로 개방 된 바닷가는 이미 갯벌이 죽어 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서 사실을 확인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충남 서천군 비인면 월하성 갯벌체험장까지 무려 세 시간이상을 달려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물이 빠져서 훤히 바닥을 드러낸 갯벌을 향해서 부지런히 나아갔다. 이곳은 맛살을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지만, 또 하나 백합이라고 알고 있는 조개잡이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선 처음 들어갈 때는 물이 저만치 밀려 나가고 있어서 아직 맛조개를 캘 수 없는 시간이라고 하였다. 맛조개를 잡으려면 물이 충분히 나간 다음에 물이 거의 빠진 모래밭이라야 잘 잡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맛 조개를 잡는 재미가 제일이라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몇 번을 시도해 보았지만, 물이 많아서 잘 잡히지도 않고 소금만 뿌려 대고 말았다. 3개월 전에 왔을 때는
어린이들이 버릇없이 굴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흔히 하는 말이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더냐?'라고 한다. 글쎄?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가정에서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었을까? 요즘 가정에서 어린이들에게 기본 질서를 가르치는지 묻고 싶다. 사실 어린이들의 일상생활에서의 기본적인 예절이나 행동은 가정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는 이렇게 버릇없이 하는 짓을 보면 흔히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거, 뉘집 자손인고 좌립할 줄을 모르는 구만...."하시는 말을 들었다. 어느 학교 아이인가가 아니라, 뉘집 자손이냐를 따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런 것을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본적인 예절이나 규율을 지키고,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 같은 것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요즘은 가정에서 이러한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아니 당연히 가르쳐야할 일을 안 가르쳐서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서 꾸짖기라도 하면 잘 못 가르친 부모로서 부끄럽게 생각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당신이 뭔데 남의 귀한 자식의 기를 죽이려고 하느냐?" 고 따지고 싸우려고 덤비는
교장선생님이라면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조금은 점잖은 분이라는 생각이 앞설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비교적 존경을 받는 자리에 근무를 하는 분이고, 특별히 욕을 먹을 짓을 하는 일도 별로 없는 분들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엄격하신 분이고, 존경받는 위치에 서 계신다고 생각을 갖게 할 것이다. 아무리 요즘 세상이 변하여 비록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점잖은 직업이고 점잖은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교장 선생님이 정년 퇴임을 하자마자 이제 할 일이 없으니까 다른 일을 찾아 나서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그 중에 상당수가 야간 당직을 서는 경비업체에 고용이 되어서 야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야근이라면 범죄예방이나 여러 가지 힘들어서 해야 할 일도 있을 텐데, 요즘 대부분의 경비업체에서는 정년 퇴임을 한 분들을 주로 뽑아 쓰고 있다. 이런 곳이 아닌 전혀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신 분들이 가끔 눈에 뜨인다. 부동산 중계업을 하는 분들도 그렇고, 택시 기사로 취업을 하신 분들도 가끔은 눈에 띈다. 오늘 여기 소개할 분도 그런 분 중의 한 분이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을 하자마자 이발사 자격증을
민속박물관은 관내 전체 공간이 모두 멋진 민속 체험장으로 꾸며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시장만이 민속박물관인양 실내에서만 맴돌다가 그냥 나가면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이제 방학도 되었으니, 가족 나들이 겸해서 민속박물관을 찾을 분들을 위한 안내를 드리고자 한다. 맨 처음 민속박물관의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 쪽으로 숲길이 있다. 대부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가다가 건물 입구 가까이 있는 장승이나 하르방 정도에 조금 관심을 보이고 사진이라도 찍고는 지나친다. 건물 정면에서 건물을 배경을 사진 한 장을 찍고 나면 오른 쪽으로는 어린이박물관과 단체 입장객을 맞는 곳이라고 안내가 되어 있다. 돌아서서 가다 보면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은 돌기둥이 하나 떡 버티고 서 있다. 자세히 보면 기둥에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옛날 우리 나라 서울의 한 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에 세워졌던 수표교의 수표이다. 물이 차 오르면 얼마나 찼는지 알아 볼 수 있게 요즘 우리가 쓰는 자처럼 눈금으로 높이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수표를 지나면 어린이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건물 앞마당이 나온다. 제법 넓게 정돈된 마당에는 한 곳에는 커다
지금부터 35년전의 이야기가 되는가 봅니다. 전남 시골 면 소재지에서도 4km 이상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초등학교 전남 보성군 득량서국민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시절에 나는 어린이들의 글짓기 지도를 열심히 하였었습니다. 그 당시 이 시골학교의 어린이들의 작품이 제법 자주 신문에 오르곤 했었습니다. 그 때 이 어린이들의 작품이 실린 신문 몇 장이 지금까지 잘 보관이 되어 있어서 이 작품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작품들을 지금은 폐교가 되어 없어져 버려 아쉬워하며 만들어서 운영하는 학교의 동문회 카페에 올려 주었습니다. 그 때 어린이들이 지금은 40대 후반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고등학생, 대학생의 자녀를 둔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을 그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의 작품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생각하면서 작품을 올려 주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워할까? 아니면 부끄러움에 창피해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친구들에게 볼 수 있도록 그 학생들이 속하는 동기생의 카페에 글을 올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16회 장순화의 초딩4년 때 신문에 뽑힌 작품 [1971년 6월7일 삼남교육신보 (제207호) ****이 주일에 뽑은 글*** 보 리 밥 보성득량서교
나는 이상보박사님을 뵈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사실 박사님을 알게 된 것은 서대문문인협회가 재 창립되면서부터 이었으니까 불과 2년 남짓인 셈이다. 첫인상은 그냥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은퇴한 노신사로 보였다. 그렇게 알고 지내면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차분하게 일의 전후를 살피면서 조정을 해주시는 모습에서 역시 원로다운 분이구나 싶었다. 그런 정도로만 알고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박사님을 꼭 뵈어야 할 일이 생겼다. 박사님께 전화를 드리고 박사님 댁이나 아니면 편리하신 곳으로 만날 장소를 정해주시라는 부탁을 드렸다. "내가 내일 그 시간에 시내에서 일을 보고 들어올 시간인데, 오면서 들르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거기가 어디이신지? 제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홍제 전철역에서 내려서 4번 출구에서 조금 내려가면 [대양서점]이라는 고서점이 있어요. 거기에서 오후 3시에 만납시다." 문학 단체에서는 몇 차례 뵈었지만, 내가 단독으로 따로 만나기는 처음이기에 다방이나 조용한 곳으로 가시자고 해보았으나, 그곳에서 볼일이 있으니까 거기 들러야 한다면서 꼭 거기로 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이 드신 어르신을 모시는 자리로는 적당치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