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통 아이들을 떠올리면 해맑게 웃는 모습일 것이다. 부모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극장도 가며 즐겁고 밝게 웃는 모습, 그게 일반적인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엔 그런 아이들이 아닌 가난과 돈 때문에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부모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가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는 초콜릿은 불법 매매된 어린들의 슬픈 눈물이고, 부잣집 거실에 깔려있는 고급 카펫은 부모에 의해 팔려간 아이들의 고통과 절망의 눈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어른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는 농장에서 무임금과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어린이들의 노동의 결과물이다. 아직도 어린이를 착취하는 나라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실제 지구상에는 어른들의 탐욕에 의해 고통 받고 눈물짓는 어린들이 무척 많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다. 그 슬픈 어린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쓴 작품이 카펫을 짜는 아이들이다. 이 책은 어두운 카펫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 이야기 두 편을 소개하고 있다. 부모에 의해 카펫 공장에 팔려가 탈출하는 네메쿠의 이야기. 카펫 공장에 노예로 팔려와 배가 고파 당나귀 똥에서 썩지 않은 통보리를 주워 먹다 감독관에서
요즘 자주 접하는 책 중의 하나가 동화다. 어릴 땐 책을 구할 기회가 없어 동화책을 사보거나 빌려본 적도 거의 없다. 동화라고 하면 한 겨울 이부자리를 무릎까지 세우고 옛날 옛날에 시작하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누나 형들에게 들은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내게 동화란 그저 옛날이야기 정도로 인식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동화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애들이나 보는 책 뭐 이런 마음이 동화를 부러 멀리 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동화에 부쩍 관심을 가지고 책을 보게 된 것은 2년 정도다. 우리 집 꼬맹이들에게 사준 동화책도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곤 그 속에 빠져 웃기도 하고 가슴 뭉클해하기도 했다. 지금도 동화란 이름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동화를 어린이나 보고 읽는 책이라고 좁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화 중에 어른을 위한 동화나 우화 성격의 동화도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동화는 아이들의 시각에 맞추기 때문에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그 속엔 슬픔, 사랑, 고통,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또 선과 악, 지혜와 무지의 대립이 은연 중에 드러나 아이들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따라서 동화 속엔 인간에 대
생의 끝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죽음이란 놈이 검은 손을 뻗어 자신의 목숨을 막 채어가려는 찰나에 이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떤 아픔도 슬픔도 받아드리며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일을 경험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내 손에 들린 한 권의 책이 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죽음의 순간 불꽃 같은 희망 하나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 한 시간도 아니고 십 분도 아닌 일 분 후의 삶. 삶의 막다른 곳에 이른 사람들은 자신이 삶이 일 분 후에도 지탱될 것인가 반문한다. 그러면서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니 놓을 수가 없다. 희망의 끈을 놓는 순간 삶은 더 이상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희망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거짓말일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부질없는 희망을 접어버리는 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선택할 일은 오직 하나이다. 그 거짓말이 현실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는 것. 사람은 힘이 없을 때 죽는
아이들이 모두 떠난 빈 교정을 걷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고함 소리, 발자국 소리, 숨결 소리가 가득했던 운동장. 그 운동장엔 잡초들이 성글게 자라고 있습니다. 아마 한 달 내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잡초들은 마음 편하게 자랄 것입니다. 텅 빈 교실에 들어가 봤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왁자한 교실이었는데 작은 적요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얼굴로 밀려옵니다. 창문을 열고 교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하나가 괜히 반갑게 느껴집니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동안 쓰레기 때문에 연신 잔소리를 해댔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잔소리를 유발했던 종이(쓰레기) 하나가 반갑게 느껴지다니 참 요상합니다. 아마 쓰레기로 인해 잔소리 하면서 아이들과 정이 들어서인가 봅니다. 종이 하나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모습이 거울 속에 비칩니다. 왠지 낯설게 보입니다. 아마 아이들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교실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항상 살갑게 웃는 아이도 있고, 늘 인상을 쓴 채 불만에 가득한 아이의 얼굴도 있습니다. 항상 교복 단추를 풀어헤쳐 아침 시간마다 혼나던 아이도 있
“무슨 책을 그렇게 읽으세요?” “응, 맛난 책.” “참내, 책이 뭣이 맛있어요. 무슨 음식이에요.” “아냐, 책도 맛난 것이 있고, 맛없는 것도 있어. 어떤 것은 씹어도 팍팍해서 뱉어내고 싶은 게 있고, 생각날 때마다 빼먹고 싶은 곶감 같은 책도 있어. 너도 읽어 봐 시험 끝나면. 생각이 넓어질 거야.” “책이 뭔데요?”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책이야. 너도 알고 있는 정약용, 박지원, 유몽인, 이덕무, 강희맹 같은 분들의 글을 모은 책인데 그들의 일상적인 사는 이야기를 적어 놓았지. 그러면서도 생각의 맛과 풍류를 엿볼 수 있어.” 쉬는 시간 입시 상담을 하러 온 한 학생과의 간단히 이야길 나누었던 장면이다. 흔히 박제가나 정약용, 박지원 같은 분들의 글이라 하면 어렵고 딱딱하고 관념적인 글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옛사람들의 글 대부분이 그럴 거라 지레 짐작한다. 그건 아마 그들이 쓴 글이 한문으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서 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고전이라고 읽고 소개받았던 책들을 보면 대부분이 서양의 고전이거나 무슨 담론을 이야기한 것들이다. 그래서 고전 하면 가장 먼저 어렵
전주를 흔히 예향의 도시라 한다. 그리고 전통이 살아있는 도시라 한다. 실제로 전주 한옥마을 중심엔 전통의 맛과 멋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죽 늘어서 있다. 골목골목마다 은은한 차향이 이는 한옥의 전통찻집이 줄지어 있고, 이곳에선 가야금의 선율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또 매주 주말이면 전통문화세터에서 판소리와 민요, 농요 등을 감상할 수 있는 놀이마당이 펼쳐진다. 뒤풀이로 간단한 음식과 음료 그리고 막걸리가 나오기도 한다. 물론 돈은 내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시민들과 함께 향유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허면 전통의 멋이 어우러진 전주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얼까. 아마 비빔밥이 아닐까 한다. 비빔밥 외에도 콩나물국밥 등 유명한 음식들이 있으나 비빔밥에 비할까. 전주여인들의 솜씨와 정성이 만든 비빔밥 그럼 왜 전주비빔밥이 맛이 있고 유명할까? 전통 전주비빔밥은 본래 사골국물을 이용해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갖은 나물과 고기, 양념들을 넣어 만든다. 고추장도 일반 고추장이 아닌 꿀을 이용해 만든 고추장을 사용한다. 일종의 양념고추장이다. 이렇게 만든 비빔밥은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하다. 물론 지금은 옛날처럼 모두 사골 국물로 밥을 짓는 건 아
역사와 관련한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우리와 우리 주변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반문을 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리고 알고 있던 이면에 또 다른 것들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곤 자신의 과문함을 탓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린 역사를 바라볼 때 승자의 처지, 있는 자의 처지에서 기록하고 남긴 것들을 중심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배웠다. 그러면서도 어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모습이나 태도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마 그러한 것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고 생각하게 한 책이 있다. 박노자의 이다. 러시아 출신으로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노자는 이 책에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졌던 이야기나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던 이야기들, 그리고 과거의 사건이 현대에도 되풀이되는 역사적 아이러니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들려주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그의 시각은 상당히 좌파적이다. 그래서 선한 웃음 뒤에 숨은 미국의 냉혹한 비수를 비판하기도 하고, 피를 먹고 자란 일본 신문을 통해 우리의 족벌 언론을 돌아보기도 한다. 또 하나, 현재 사회적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는 비정규직
“러시아에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핵탄두보다 더 강력한 비밀 병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날씨였다. 전사자 수는 늘어만 가고 실낱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은 극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언제나 날씨와의 전쟁으로 귀결되었고, 러시아는 대부분 날씨 덕분에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의 날씨에 관한 명언 중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러시아에는 믿을 만한 장군이 둘 있는데, 바로 1월 장군과 2월 장군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장군이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혹독한 날씨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하고 자긍심을 가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들의 역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는 두 번의 큰 침공을 받았다. 한 번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유럽의 황제를 꿈꾸었던 나폴레옹에게, 또 한 번은 히틀러에게. 그러나 두 사람의 야욕은 실패를 하게 된다. 이유가 무얼까? 그건 군사력도 아니고 작전수행능력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바로 날씨 때문이다. 러시아의 무더위와 혹한의 날씨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삶의 성공여부에도 날씨가 개입하는 경우는 많다
능가사는 전남 고흥 팔영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땐 10대 사찰 중의 하나로 뽑혔고, 조선 시대엔 호남 4대 사찰 중의 하나였을 정도로 웅대한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고요하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천왕문과 대웅전, 능가사 사적비와 요사체 같은 몇 채의 건물과 텅 빈 넓은 뜨락이 옛 모습을 가늠하게 한다. 사실 능가사는 입구의 천왕문의 사천왕상과 대웅전이 아니라면 절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그저 고즈넉한 그러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정원에 들른 기분이다. 천왕문의 문턱을 넘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대웅전이 한눈에 들어오고 왼쪽의 범종각이 서있다. 그리고 넓은 뜰이 퇴색한 궁전의 뜰처럼 길다랗게 나있다. 잡초도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뜰을 천천히 걷다 보면 쓸쓸함은 이내 가시고 평안함이 마음에 깃든다. 다른 절에서는 맛보지 못한 것이다. 대개 이름난 절을 가면 이것저것 감상하는데 눈이 많이 쏠린다. 그러나 능가사는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맛이 더 좋다. 그렇게 걷다 보면 굳이 부처님에게 합장하지 않아도 평안이 깃든다. 뜰을 느릿느릿 거닐다 보면 절집 사람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띈다. 작은
‘여우’ 하면 어떤 단어가 생각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우’란 말을 들었을 때 ‘꾀가 많다’ ‘얄밉다’ ‘눈치가 빠르다’ ‘구미호’ 이런 말을 떠올립니다. 주로 학생들이 생각하는 말들입니다. 그럼 어른들은 어떨까요. 옛날 어른들은 약삭빠른 사람을 지칭할 때 ‘백여시’ 같다는 말을 주로 사용했어요. 백여시란 단어는 나이 든 여우처럼 능글맞고 교활하고 눈치 빠른 사람에게 쓰는 부정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아기 여우’를 주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말하라 하면 전혀 다른 답이 나온답니다. ‘귀엽다’ ‘부드럽다’ ‘꼭 안아주고 싶다’ 등 주로 친근한 단어들입니다. 사실 여우는 우리 민족과 친근한 동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무서운 존재로 등장하는 동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렸을 땐 “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 잠 잔다 / 잠꾸러기 /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 세수한다 / 멋쟁이 /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 밤 먹는다 / 무슨 반찬? / 개구리 반찬 / 죽었니? 살았니? / 죽었다 (또는) 살았다 / 하며 여우놀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의 간을 빼먹는다는 여우의 이야길 들을 땐 온 몸이 오싹해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책을 읽다 보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게 있고, 더디게 들어오는 게 있다. 그건 아마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찌됐든 눈에 들어오는 책은 아무리 딱딱한 글이라도 금새 읽어나가고, 더디게 다가오는 글은 쉬엄쉬엄 읽게 된다. 어떤 때엔 한쪽에 놓아두었다가 눈에 띄면 읽는다. 내겐 김승희의 가 그렇다. 쉬는 시간 틈틈이 책을 읽다가 덮어두고 있는데 친한 동료 여직원이 읽을 만한 책을 찾는다. 그래서 무심코 준 책이 김승희의 책이다. 그런데 그 동료는 금세 읽고는 좋다며 가져다준다. “벌써 읽었어요. 괜찮아요?” “아주 공감이 가고 좋았어요.” “그래, 난 영 더디고 안 나가던데.” “난 여자잖아. 그래서 이 책이 쉽게 공감이 가고 잼있게 읽은 것일 거예요.” 여자니까 쉽게 읽고 남자니까 더디게 읽는다. 정말 그런지도 몰랐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글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녀의 글은 지극히 여성적, 여기서 여성적은 부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의 시각에서 개인으로서의 여성과 사회구조면서의 여성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대부분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이나,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김승희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길이다. 간밤에 늦게까지 한 약주 탓인지 몸이 무겁다. 가뭄 끝에 내린 단비 때문인지 산빛이 더욱 푸르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전주에서 3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고흥의 팔영산(八影山). 오는 도중 간간히 비가 뿌려 염려를 했는데 다행이 도착할 무렵엔 산봉우리에 흰 구름만 걸려 있을 뿐 날이 맑다. 산에 오르기엔 그만이다. 한때 호남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던 능가사를 곁에 두고 구름 속에서 웅장한 자태를 보일 듯 말 듯 드러내고 서있는 팔영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습한 기운 때문인지 이내 땀이 송골송골 베어온다. 거기에 한 무리의 모기들이 윙윙거리며 따라온다. 손을 휘적거려도 질기게 따라 붙는다. 이놈들은 팔영산 1봉을 오르는 길목인 흔들바위에 오를 때까지 따라붙는다. '징한' 놈들이다. 팔영산은 8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산의 이름도 팔영산(八影山), 팔령산(八靈山), 팔점산(八点山) 등 다양하다. 그리고 8개 봉우리마다 이름에 따른 시가 적혀 있는 것도 팔영산만의 독특한 운치다. 산에 오른 자들은 정상에 서서 시원하게 펼쳐진 고흥의 바다를 바라보며 시 한 편 읊조리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우뚝한 바위덩어리로 되어 있는 제 1봉
어둠이 깔리면서 거리의 전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네 명의 무희가 야외무대 위로 올라온다. 진한 화장, 예쁜 미모. 무섭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살포시 웃는 모습을 보면 무섭다는 생각이 이내 달아난다. 꿩의 깃털을 단 붉은 모자, 부채와 방울을 든 손. 기원을 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방울을 왼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친다. 그리고 부채를 활짝 펼쳐든다. 국악 장단에 맞춰 춤이 시작된다. 무당춤이다. 무희들의 춤은 현란하다. 방울을 흔들어대고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하며 돌고 돈다. 사람들은 그 현란한 춤에 넋을 잃고 바라본다. 무당춤, 언뜻 생각하면 좀 괴기스럽고 무서울 것 같은 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음악도 실제 무녀들이 춤을 출 때처럼 오싹한 맛을 주지 않아 구경하는 사람들도 좀 더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방울 소리도 그리 요란하지 않다. 그런데 왜 무당들은 춤을 출 때 방울을 흔들까. 예로부터 무당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통로구실을 해왔다. 지금이야 무속이 미신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상고시대부터 무(巫)는 신의 말을 대신 전하는 인물로 중요시됐다. 이때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전에 이들은 춤
첫 만남부터 지각하는 아이 아침부터 잠만 자던 아이 하고 싶은 게 뭐냐 물으면 아무것도 없다면 눈을 내리던 아이 간혹 입에서 담배냄새가 나 물으면 나 그런 거 모른다며 인상 쓰는 아이 그러다 어느 날 그냥 노는 게 좋다며 세상 숲으로 날아간 아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그 아이에게 암 수술을 하던 아버지의 눈물어린 말과 외숙모의 사랑한다는 말에 마음을 돌려 다시 세상 숲에서 돌아온 아이 아홉시 넘어 교실문을 밀치던 그 아이 요즘은 여덟시가 되면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 너무나 예쁜 그 아이 초록빛 얼굴을 한 그 아이 오늘 그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한 달 동안 나오지 않다 그 아이가 학교에 나온 지 오늘(25일)로 열흘째다. 그 열흘 동안 아이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만 했다. 아침 일찍 등교하면 학생부실에서 지정한 봉사활동을 했다. 가끔 아이를 불러 "힘들지 않니?" 하고 물으면 괜찮다며 싱겁게 엷은 미소로 넘어갔다. 그것뿐이었다. 그 아이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약속만 지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켰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그 아이는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
역사 하면 일면 딱딱함을 연상한다. 또한 과거의 흘러간 사건이나 이야기쯤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는 과거의 역사에 얽매이는 사람들은 비웃기도 한다. 아무리 화려한 역사라 할지라도 현재 초라한 모습으로 있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투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 삶이 자화상이 될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역사에 눈을 기울여 보면 과거의 모습들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며 이루어진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모습들을 현재의 우리 모습과 결부시켜 흥미진진하게 써내려간 책이 있다. 이덕일이 쓴 역사사랑이다. 역사 사랑이라, 여기서 사랑은 러브가 아니다. 사랑방의 사랑(舍廊)이다. 과거 사랑방은 대화의 장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모여 공론을 모으기도 했고, 은밀한 사랑을 만들기도 했고, 세상사를 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그 대화의 장, 공론의 장이 별로 없다. 많이 이야기하고 떠들기는 한 것 같은데 내면을 들여다보면 왁자지껄한 메아리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만 한다. 그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