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는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가 있는 호반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소양강 처녀’ ‘춘천 가는 기차’ ‘겨울연가’ 등 대중가요와 드라마에 등장해 많은 사람이 찾는 도시다. 하지만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여자도 항일전쟁 나서야”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날인 11월 17일을 잊지 않기 위해 193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정했으며, 199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순국선열’은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 전후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분들이다. 국가보훈부에서 독립유공자로 훈장과 포상을 받은 분은 올해 8월 기준, 1만 8139명이다. 이 가운데 여성은 전체의 3.65%인 663명에 불과하다.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거나, 식사 제공, 군수품 운반 등 독립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은 독립군의 지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아무리 여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을 신라가 지배하면서 자연히 독도도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됐다. 조선시대 태종이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는 무인도가 됐다. 왜구들의 노략질과 나라에 대한 의무를 피해 울릉도로 달아나는 백성이 많고, 울진에서 140㎞ 떨어졌으며, 바다가 깊어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인들의 불법 어로가 발생하고, 나무를 베어가는 일이 잦아지자, 숙종 때 안용복 장군이 일본에 항의하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받아왔다. 일본 주장, 거짓인 증거 많아 조선은 1883년부터 울릉도 이주 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울릉도 거주민이 늘어나자, 1900년 10월 25일 고종은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울도(울릉도) 구역은 울릉전도·죽도·석도를 관할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기념해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2000년에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제정했다. 또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총이 시·도교총 등과 함께 같은 날을 전국 단위 독도의 날로 선포했다. 이러한 ‘독도의 날’ 제정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1900년 10월 25일 제정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독도’를 공식적으로 우리 영토로 언급한 날이기도 하다. 칙령 제2조는 "울도(울릉도) 구역은 울릉전도·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중 죽도는 대나무가 많아 ‘댓섬’이라고도 불리는데 울릉도 동쪽에 있는 면적 약 20만 ㎡의 섬이고 석도는 곧 독도로 면적 18만 ㎡다. 울릉도 부속 도서에는 이외에 관음도도 있는데 면적이 작아(7만 ㎡) 칙령에서 생략된 것으로 추측된다. 섬 일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분명 독도는 한국 땅이지만 일본은 자주 시비를 걸고 있다. 호적을 독도로 옮겨 주권을 침해하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그러나 독도는 분명 한국 땅이다. 주권을 행사하는 데 공헌한 사람은 안용복 장군을 비롯한 독도의용수비대 등이다. 독도는 울릉도와 더불어 우리 땅을 지켜온 섬이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27번지(서도 주민 거주지: 독도안용복길3, 독도경비대: 독도이사부길55)로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87.4km에 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를 포함해 36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비록 작은 섬이지만 항상 우리의 바다와 하늘을 지켜준 소중한
조선 후기 서예가로 우리나라는 물론 청나라까지 알려진 김정희. 김정희는 중국에서 맥이 끊긴 서법을 금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추사체’라는 고유의 서체를 완성했다. 김정희의 집안은 양반 중에서 양반 가문이다. 영조의 부마로 화순옹주와 혼인한 김한경이 양증조부이기에 예산 땅을 사패지(임금이 내린 논과 밭)로 받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었다. 순조 때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정순대비와도 친척이었다. 김정희 자신도 오늘날 차관에 해당하는 참판 벼슬을 한 고위 인사이다. 그러나 권력과 부귀영화가 어찌 영원한 게 있으랴. 1840년, 김정희의 나이 55세일 때 아버지에게 사약이 내려졌고 자신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가서 9년 동안 송계순과 강도순의 집에서 귀양살이했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것은 김정희에게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주변에 사람이 들끓다가 멀어져 외톨이가 되니 설움과 배신감으로 더 쓸쓸했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에 중국을 오가는 역관(통역)인 이상적이 있었다. 이상적은 중국에 12번이나 왕래한 유능한 역관이었다. 이상적은 역관이면서도 시문에도 능해 중국에서 은송당집이란 시문집을 발간한 유명한 시인이었다. 이상적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찾는 계곡이나 바다만큼 시원한 곳이 바로 창덕궁 후원이다. 이곳에는 울창한 숲과 시원한 계곡, 연못이 있어 무더위를 식혀줄 청량감이 있다. 조선의 제2궁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상징적인 정궁이라면, 창덕궁은 많은 임금이 생활했던 제2궁이다.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했으나, 태종이 즉위해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창덕궁을 지었다. 태종은 궁궐 건물들을 지은 후 후원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정궁인 경복궁과 창덕궁 등이 불타자, 광해군은 경복궁 자리가 불길하다고 하여 창덕궁을 정비하고 정궁으로 사용했다. 인조반정 때 불탔으나 인조 25년(1647)에 다시 복원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270여 년간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됐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이다. 다른 궁궐의 문이 삼문(三門)인 것에 비해, 돈화문은 오문(五門)이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가 사는 궁궐인 자금성에서나 볼 수 있는 오문을 만든 것은 자주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삼문만 사용한 것은 아쉬움이 크다. 문 앞에 월대를 쌓고 2층으로 된 문을 궁궐보다 높게 만들어 위엄을 나타낸다. 그러나 순종이
‘방귀 길 나자, 보리양식 떨어진다’라는 속담이 있다. 6월에는 24절기 가운데 9번째에 해당하는 ‘망종((芒種)’이 있는 달이다. ‘망종((芒種)’은 일 년 중 논보리나 벼 등 곡식의 씨를 뿌리기에 가장 알맞다는 날이다. 보리를 수확하며 굶주림의 시기였던 ‘보릿고개’를 살아서 넘기게 되는 것이다. ‘보릿고개’ 시기에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목조 기와집으로 조선 후기의 누정(누각과 정자를 함께 일컫는 것으로 ‘정루’라고도 한다) ‘운조루(雲鳥樓)’다.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조선 영조 때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胄:1726-1797)가 영조 52년(1776) 지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누정인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오미동 류씨 집안 사랑채다. 류이주는 조선 후기 무신이자 건축가로 대구에서 태어나 17세에 한양으로 올라와서 영조 29년(1753),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영조 43년(1767) 수어청 별장으로 남한산성을 쌓는 데 참여했고, 영조 47년(1771)에 홍봉한의 추천으로 전라도 낙안군수로 임명됐으나, 당쟁에 휘말려 함경도 삼수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1958년 5월 강경여고의 동아리, 청소년적십자단(RCY)은 현직 선생님, 퇴직 선생님, 몸이 불편한 선생님들을 방문했다. 청소년적십자 충남협의회는 강경여고 청소년적십자단의 활동을 뜻깊게 생각하고 1963년 9월 21일을 충남 지역에서 ‘은사의 날’이라 해 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날로 정했다. 1964년부터는 5월 26일로 날짜를 바꿔 '스승의 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한글을 창제한 민족의 스승 세종대왕의 탄생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 세종실록 1권 총서에는 “태조 6년(1397) 4월에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였으니”의 탄생 기록에서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준수방은 어디일까? 준수방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 옥인동 일대로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인왕산의 물줄기가 청운동과 옥인동으로 흐르다 만나는 곳이다. 현재는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 9길을 지나면 인도에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 하나만이 있다. 이곳에 기념관이나 생가라도 복원했으면 한다. 여주 영릉 여주에 있는 영릉은 원래 서울시 서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