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지 92주기가 된다. 지난해 12월 8일,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9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 가나자와로 향했다. 이국땅의 차디찬 감방에서 구금돼 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 의사의 흔적을 찾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훙커우 의거로 독립의 열망 알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사변 승리를 축하하는 식장에 물통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총사령관과 가와바다 거류민 단장을 도륙하고, 일제의 중요 인사들을 다치게 한 의거를 단행했다.
윤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는 거의 식물상태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다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해줬다. 즉, 의거 직전의 임시정부는 임대료도 내지 못할 만큼 열악한 환경인 데다 독립운동가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개전투로 활동했는데, 윤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다시 일제에 항거하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됐다.
게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나 몰라라 하던 중국 주석 장제스는 의거 소식을 듣고 "중국인 100만 대군과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한 명이 해냈다"고 감탄하면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이 있었는데, 중국 주석 장제스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을 설득해 한국의 독립을 문서로 나타내는 성과를 이뤘다.
윤 의사는 의거 후 피체돼 상하이 헌병대에 구금됐다. 배후를 캐내기 위해 온갖 고문을 가해도 윤 의사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와 교포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통을 받자, 백범 김구 선생이 ‘홍구공원 폭탄 사건의 진상(한인애국단)’을 작성해 상하이의 주요 신문에 보내 보도하게 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윤 의사 의거로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은 김구 선생은 일본 헌병과 경찰들을 피할 수 있었다.
일제는 윤 의사가 의거한 지 21일 만에 군법회의에 기소하고, 5일 만에 사형을 선고할 만큼 다급했다. 일제가 속전속결로 처리한 건, 시간을 끌다가 윤 의사의 의거 소식 등이 한국인들에게 알려지면 독립의 열기가 높아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거룩한 마지막 모습
윤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과 일본이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일본군 대부분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헌병대도 함께 돌아가면서 윤 의사도 11월 18일 일본 우편 수송선인 다이요마루(大洋丸) 호를 타고 혼슈와 규슈 및 시코쿠 사이의 좁은 바다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11월 20일 새벽 4시에 고베항 바깥의 와다미사키(和田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오사카 헌병대에 인계된 윤 의사는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용됐다. 이곳은 한때 시라카와 대장이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곳으로, 시라카와의 복수를 위한 조치라는 생각이 든다.
12월 18일 오전 6시 25분, 삼엄한 경비 아래 윤 의사는 오사카를 출발해 오후 4시 30분에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의 제9사단 형무소로 옮겨졌다. 지금도 오사카에서 가나자와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소요되는 먼 지역이다. 일본은 왜 이 먼 곳으로 윤 의사를 이송한 걸까? 제9사단장은 바로 훙커우 공원에서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당한 우에다 중장이었기에, 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윤 의사는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척이는데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6시였다. 윤 의사는 무장한 헌병들과 함께 형무소를 나섰다. 7시가 넘어 미고우시 공병작업장에 도착했다. 총살형을 집행할 10명의 헌병과 집행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토 검찰관이 윤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물었다.
"미리 각오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말하는 윤 의사의 말에 일본인들은 침착하며 굳센 모습의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윤 의사는 십자로 된 형틀에 묶이고, 눈이 가려져 바닥 거적에 무릎이 꿇렸다. 일반적으로 총살형은 선 채로 하는데 무릎을 꿇게 한 것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일본의 잔꾀로, 비인도적인 처사였다. 오전 7시 40분, 윤 의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남을 의혈남아로 쓴웃음을 지으며 생을 마쳤다.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문에 공식적으로 문서화해 일본이 ‘한국과 대만의 영토화를 보장하면 항복하겠다’라고 미국에 제의한 것을 무마시킨 장본인, 매헌 윤봉길 의사. 일본은 시라카와의 복수를 위해 그가 죽은 아침 7시 30분에 총살형을 집행하는 잔인함을, 또한 심장을 겨냥하는 일반적인 총살형 방식이 아닌 윤 의사의 눈을 이마까지 가리고 정수리를 겨냥해 흰 천에 피가 나오도록 함으로써 일본 국기를 연상하게 하는 등 악독한 행위를 했다.
또한 윤 의사가 순국한 뒤 일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아래에 암장했다. 복수를 위한 그들의 행위에 분노가 치밀면서 가슴이 아팠다. 지금은 노다산 공동묘지의 한 부분에 자리한 윤 의사의 순국지와 암장지. 그곳의 땅을 밟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고 윤 의사에 대한 경외심이 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오직 조국의 광복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순국한 윤 의사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야겠다. 일본도 윤 의사의 순국지를 일반에 공개해 진실한 모습을 보이고 한일 간의 화해와 우호 증진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3월 6일 발굴해 5월 15일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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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의사는 의열 투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명추>, <옥타>, <임추>, <한시집> 등의 시집에 340여 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었다. 그 중 ‘학행’은 칠언절구로 윤 의사가 14세인 1922년 7월 열린 시회에서 명(明), 청(晴), 성(聲)이라는 운자를 받아 낙운성시(落韻成詩, 운자를 받아 즉석에서 시를 지음)했다.
‘학행’은 웅대한 표현과 호방한 기상이 돋보여, 시회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학행’은 옥련환시(玉連環詩)의 형식으로, 시의 제1구 마지막 3자인 ‘사기명(士氣明)’이 제2구의 첫머리에 오고, 같은 형식이 제2구, 제3구에도 반복돼 결국에는 제4구의 마지막 3자인 ‘불후성(不朽聲)’이 제1구 첫머리에 다시 놓이면서 아름다운 순환구조를 완성했다.
불후성명사기명(不朽聲明士氣明) :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맑고
사기명명만고청(士氣明明萬古淸) : 선비의 기개 맑고 맑아 만고에 빛나리
만고청심도재학(萬古淸心都在學) :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며
도재학행불후성(都在學行不朽聲) : 배워서 잘 실천하면 그 이름 쓰러짐이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