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놀이는 이름 그대로 음력 7월 15일 백중날 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밀양 지역의 농민들이 전승해온 밀양 백중놀이는 김매기를 마친 일꾼들이 푸짐한 먹을거리를 즐기면서 활발한 놀이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밀양에서는 이 날을 머슴날이라 했다. 밀양 백중놀이의 근원적 배경이 된 것은 농군들의 세시놀이이다. 놀이는 크게 ‘농신제’, ‘작두말타기’, ‘춤판’, ‘뒷놀음’으로 나뉜다. ‘농신제’는 마당에 농신대를 세워 고사를 지내고 농신대를 돌며 풍년을 비는 의식으로, 저릅대(삼대)로 만든 농신대를 향해 삼배(三拜)를 하여 오방신장을 일으켜 잡귀를 막고 신이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작두말타기’는 농신제가 끝나고 머슴들 가운데 그 해 농사를 제일 잘 지은 사람을 머슴 장원으로 뽑아 지게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워 놀이판을 돌면서 나발을 불고 풍장을 치면서 흥을 돋우어 시위하는 놀이로 머슴이나 소작농들의 서러움을 흥겹게 풀어준다. ‘춤판’은 양반춤으로 시작된다. 갑자기 머슴들의 놀이판에 끼어든 양반들이 장단에 맞추어 거드름을 피우며 느릿하게 추고 있으면, 이러한 양반의 모습이 못마땅한 머슴들과 정지꾼(부엌에서 일하는 여인)들이 양반을 놀이판에서 쫓아내기 위해 난쟁이
[PART VIEW]세 시간에 걸쳐 마을을 관통하는 축제 기지시 줄다리기를 찾아 백만종 | 전 서울서초초 교감 우리나라 줄다리기의 연원은 아득한 옛날 삼한시대에 농경문화가 발달한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줄다리기는 농경사회의 풍년 기원 및 제례의식의 테두리를 벗어나 지역 간 또는 마을 간의 대항 행사로 발전해 지역민과 마을 사람들의 단결심과 협동심을 고취하는 집단놀이로 발전됐다. 우리나라는 중부 지방 이남 곳곳에서 줄다리기가 많이 행해졌고, 오늘날에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경남 창녕군 영산면의 영산 줄다리기(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와 기지시 줄다리기가 쌍벽을 이루며 전통과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기지시 줄다리기는 많을 때는 10만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참여해 공동체를 확인하는 민속행사로 농촌 사회의 협동 의식을 돈독히 해주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고을 사람들 노소를 막론하고 참가해 줄을 당겨 승패를 겨루는 큰 축제이다. 줄다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전야제로 당제를 지내는데 기지시 인근 국수봉 정상에 있는 국수당에서 당제를 지내고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줄다리기는 그동안 윤년이 드는 해의 음력 3월 초에 택일해 하다가, 몇 년
영산면에는 영산 지방에서 생겨나 영산 지방에서만 전승되는 독특한 놀이가 있는데 그것이 영산 쇠머리대기이다. 이 놀이는 목우전(木牛戰), 나무쇠싸움, 목우붙인다, 쇠머리 댄다 등으로 불리었다.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영산읍을 사이에 두고 영취산과 함박산이 두 마리 소가 마주보고 겨루는 형상이어서 이 두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 고을의 불행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무쇠의 구조는 몸체와 머리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매우 간단하고 소박하다. 머리 부분은 길이 약 10m 남짓한 통나무 세 개를 세워 위를 하나로 묶고 아래 발은 넓게 펴 큰 통나무에 엮어 맨다. 세 나무를 한데 묶어 놓은 부분에 쇠머리 모형을 깎아 세우거나 가면을 만들어 세워 쇠머리대기 또는 나무쇠싸움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몸체 부분은 머리 부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통나무로 떠받친다. 세운 나무 중간 두 곳에 나무를 가로 대고 엮어 튼튼하게 하고 또 사람이 잡고 사다리처럼 오르내릴 수 있게 한다. 나무쇠 밑바닥에는 통나무를 가로, 세로 6개씩 대고 새끼줄로 엮어 땅에 놓아도 안정되고 싸울 때에는 메기 좋도록 한다. 전면의 새끼줄을 감은 큰 통나무
강령 탈춤은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강령리에 예부터 전승되어 온 탈놀이이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탈놀이를 하면 그 해 마을에 재앙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믿었으며 그런 연유로 마을마다 탈춤패가 있었다고 한다. 또 황해도 지역에서는 단오놀이 가운데 탈춤이 가장 대표적인 놀이였으며, 단오를 전후해 해주 감영에서는 도내 각지에서 모인 탈춤패들이 경연했는데 우승하면 감사로부터 후한 상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 탈놀이는 황해탈춤형의 하나로 봉산 탈춤, 은율 탈춤과 같이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다. 황해도 탈춤은 두 갈래로 평야 지대를 대표하는 ‘봉산 탈춤형’과 해안 지대를 대표하는 ‘해주 탈춤형’으로 구분하는데 강령 탈춤은 해주 탈춤형의 하나이다.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은 황해도 탈춤의 쌍벽을 이룬다. 같은 지역의 탈춤이면서 구별되는 점으로는 첫째, 탈의 생김새로 봉산 탈춤은 귀면형의 나무 탈인데 비해 강령 탈춤은 사실적인 얼굴의 이른바 인물형이다. 둘째, 봉산 탈춤의 기본 의상은 색이 화려하며 원동에 소매를 단 더그레(조선시대 의금부의 나장들이 입던 웃옷)에 붉고 푸른 띠를 두른데 비해 강령 탈춤은 회색 칡베 장삼으로 큰소매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 셋째,
[PART VIEW] 경기도 양주시 주내동 유양리에 전승되고 있는 양주 별산대놀이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연희되어 오던 산대도감극 계통의 한 분파이며 중부 지역을 대표하는 탈놀이이다. 원래 산대놀이는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나 궁중 행사에서 펼쳐지던 놀이인데, 오늘날에는 산대놀이라고 하면 양주 별산대를 가리킬 만큼 대표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또한 양주 별산대놀이는 일찍이 1964년 12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제1호인 종묘제례악에 이어 제2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양주시민들이나 양주 별산대놀이보존회 관계자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만큼 탈춤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당시 한양의 애오개(현재의 아현), 녹번, 사직골 등의 본산대놀이를 본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PART VIEW] 이 놀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부터 양주목이 있던 양주읍에서 해마다 4월 초파일이나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의 명절이나 기우제 같은 행사에서 벌어졌다. 과거에는 마을 뒷산 솔밭의 잔디밭이나 향교 앞뜰에서 놀이가 벌어졌으나 1977년 전수회관을 건립한 뒤부터는 그 앞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10년 전인 200
통영 오광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 전에 전문 유랑 집단인 초계 밤마리(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의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아 통영에서 재구성됐다. 이 탈놀이는 정월 대보름의 세시적 행사로 놀아지다가 점차 놀이의 형태로 변했으며 4월 초의 봄꽃놀이, 9월 지역 단풍놀이 축제에서 연희되고 있다. 봄의 정기공연은 통영 봉평동 용화사 광장 주변에서 벌이는 봉숫골 봄꽃축제에서 볼 수 있다. 마당놀이로 특별한 놀이판은 없고 놀이판 둘레의 한 곳에 포장을 둘러쳐 개복청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탈꾼들이 탈을 바꿔 쓰거나 옷을 갈아입게 했다. 구경꾼들은 놀이판을 중심으로 의자에 빙 둘러앉아 볼 수 있다. 오광대는 낙동강을 분계로 좌도에서는 들놀음(야류)이라 부르고 우도에서는 모두 오광대라고 부르는데,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를 의미하며, 오행설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도 한다. 통영 오광대는 여느 탈놀이와 같이 사물을 앞세운 길놀이로 흥을 돋우며 봉숫골 벚꽃 길을 타고 올라와 고사를 지내고 본격적인 탈놀이를 시작한다. 놀이 내용은 영남의 다른 오광대와 비슷하지만 벽사 의식무는 없고 파계승에 대한 풍자가 조금 비친다. 전체 다섯 과장 중 제1과장은 법고탈(일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