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광식 / 충남 서산 부석초 교사 초등교육에 입문한지 2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광주의 아픔이 미처 가시기 전인 82년 5월 아카시아향기가 무척이나 진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남도의 끝자락 해남에서 아이들과 만났다. 지금은 희미한 기억이 되었지만 겨울이면 조개탄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그렇게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손등이 다 터서 피가 나던 아이들은 아침 등교시마다 불쏘시개로 사용하기 위해 새끼줄에 매단 소나무 곁가지며 솔방울들을 들고 이고 학교에 왔다. 그때 그 아이들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참 열심이었는데…. 지금 그들은 30대로써 이 사회를 지탱하는 큰 축이 되어 여러 곳에서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으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애들아 잘하고 있지? 어렵지는 않니. 너희들은 잘 할 수 있을 거야." 추억은 마냥 아름다운 것이라 그럴까? 그때 그 아이들은 요즈음 아이들은 보다 훨씬 더 근성도 있고, 씩씩하고, 예의바르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 가난한 나의 언어로서 그들을 다 칭송할 수 있으랴.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20년 전의 아이들에 비해서 도대체 믿음이 가지 않는다. 좀스럽지, 활동적이지 못하지,
서혜정 / 한국교육신문 기자 존 테일러 개토 지음/ 민들레 국가가 주도하는 학교라는 교육 체제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1806년 프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에 패한 뒤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대프러시아 통합을 위해 의무 학교교육 제도를 만들자고 촉구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1826년에 프러시아는 복종할 줄 아는 신민(臣民)을 기르기 위해 국민 학교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를 유럽·미국·일본이 받아들였고 제국주의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렇듯 200년의 역사를 지닌 학교교육을 ‘바보를 만드는 교육’이라고 비판하는 책이 있다. 26년간 공립학교 교사로 일했던 존 테일러 개토라는 미국의 교육 운동가가 쓴 ‘바보 만들기’는 오늘날의 공교육이,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국가 혹은 지배 계층이 유도하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을 길러낸다고 비판하고 있다.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단순하고도 힘든 노동을 견뎌낼 줄 아는 노동자,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관료 등을 길러내는 학교 교육은 결국 바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바보로 알고 좌절하는 수많은 실패자와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아인슈타인'하면 떠오르는 공식이 있다. E=mc². 아마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는 결국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 공식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5년 독일의 물리학 연보 639페이지이다.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라는 3쪽짜리 짤막한 논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이 논문을 제출한 날은 1905년 9월 27일이다. 그러니까 2005년 9월 27일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수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공식이 탄생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새로운 과학의 세계를 개척 당시 아인슈타인의 나이는 26살에 불과했다.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연속해서 발표한 4개의 놀라운 논문 가운데 맨 마지막 논문이었다. 흔히 1905년을 '기적의 해'로 부르고, 100주년이 되는 올해를 세계 물리의 해로 기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원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를 나타내는 상수인 c를 V로 표시했고, 에너지를 나타내는 E는 L로 표시했다. 또한 원래 아인슈타인이 유도한 식은 m=E/c²였다. 질량 m인 물체가 빛의 형태로 복사에너지 E를 방출한 후 물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중국은 극동의 한반도와 달리 대내외적 충격이 잦았다. 격변의 세월을 보내면서 시대적 고난의 해결사로 여러 가지 대책이 마련된 것이 후세에 '제자백가'라 일컬어지는 학문의 태동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키워드 서주(西周)시대까지 중국대륙은 존왕양이의 전통적 종법질서에 따라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국가상이 바로 서주가 아닌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유왕의 실정으로부터 시작된 주 왕실의 권위실추와 낙읍천도라는 대 사건을 바라보는 제후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금상을 폐하고 그들 스스로 왕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주나라 왕실이 최초의 중심, 다시 말해서 중화(中華)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어찌 되었건 주나라 왕의 책봉을 받은 제후의 입장에서 누구 하나 노골적으로 주 왕실 무용론을 주장하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바뀌고 만다. 비록 이름뿐인 주 왕실이지만(각 국의 제후들은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지만)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 초(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