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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만큼 성숙해진 중국대륙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꽃 핀 학문과 사상


중국대륙은 주 왕조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전국칠웅 간의 전쟁과 대립은 산업 발달과 국가 시스템의 변혁을 가져왔다. 또 살아남기 위해 국가 간에 각종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외교술이 발달하게 된다. 이 혼돈의 시기에 각국에서는 인재를 등용했고,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이루고자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이 시기에 형성된 다양한 사상들은 훗날 '제자백가'라 불리며 동양사상의 근본 뿌리가 되었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중국은 극동의 한반도와 달리 대내외적 충격이 잦았다. 격변의 세월을 보내면서 시대적 고난의 해결사로 여러 가지 대책이 마련된 것이 후세에 '제자백가'라 일컬어지는 학문의 태동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키워드
서주(西周)시대까지 중국대륙은 존왕양이의 전통적 종법질서에 따라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국가상이 바로 서주가 아닌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유왕의 실정으로부터 시작된 주 왕실의 권위실추와 낙읍천도라는 대 사건을 바라보는 제후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금상을 폐하고 그들 스스로 왕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주나라 왕실이 최초의 중심, 다시 말해서 중화(中華)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어찌 되었건 주나라 왕의 책봉을 받은 제후의 입장에서 누구 하나 노골적으로 주 왕실 무용론을 주장하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바뀌고 만다. 비록 이름뿐인 주 왕실이지만(각 국의 제후들은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지만)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 초(楚), 오(吳), 월(越) 세 나라가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기존의 '존왕양이'가 그 빛을 잃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주 왕실에 충성하는 존왕양이가 무너졌다는 것인데,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은 각기 '영토와 주권과 국민'이라는 국가의 3요소를 충족하고 있었고 주나라 왕실의 분봉을 받았던 전통적 제후국이 사라져 버렸다. 기원전 1121년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에 새로운 정치질서를 세운 이래, 당시까지 중국대륙을 하나로 엮어주던 기존의 정치적 가치관이 무너지자 대륙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말았다.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가 하면 신하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씨가 따로 있느냐는 듯이 말이다.

전국시대의 권모술수와 외교술
전국시대의 첫 신호탄은 초(楚)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진(晋)이 분열하면서부터이다. 진나라는 치열한 세력다툼 끝에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로 갈라서게 됨으로써 한(韓), 위(魏), 조(趙)와 연(燕), 제(齊), 진(秦), 초(楚)가 패권을 놓고 다투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할거하였다. 전국시대의 칠웅들은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제휴도 하는 다양한 국제관계를 맺었으며, 진(秦)과 초(楚)를 양대 축으로 각국이 이합집산하였다.

이 때는 '전국(戰國)'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너무 잦은 전투를 하다보니 전술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춘추시대의 전차가 없어지고 기병 위주의 병법과 보병전술의 발달을 가져 왔다. 청동무기에서 철제무기로 바뀌자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고 효과적인 전쟁수행을 위한 지침서인 병법서가 나왔는데, 제나라 사람인 손빈이 자신의 4대조 할아버지인 손무 이래로 전해져 오는 손자병법을 완성시켰다. 전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외교'이다. 탁월한 외교력을 가진 나라는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 당시의 미묘한 국제정세는 무려 7파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힘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며 각국은 자기편으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권모술수와 외교술을 동원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책략가들이 등장하였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생인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였다. 소진(蘇秦)은 '합종책(合從策)'을 주장하였다. 여섯 나라가 동맹하여 서쪽의 진나라에 맞서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며 장의(張儀)의 '연횡책(連橫策)'은 합종책에 대항하기 위한 진(秦)의 책략으로 여섯 나라가 진과 평화 공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합종(合從)과 연횡(連橫)이 '합종연횡(合從連橫)'이라는 한자숙어로 묶여져서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말로 등장하게 되었다.

산업 발달과 국가 시스템의 변혁
전국시대에 병법과 책략만 발달된 것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무기의 재질이 청동기에서 철제로 바뀌었다. 이는 산업 전반에 걸쳐 철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에 혁명이 일어나 철제 농기구로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수 있었고 농사에 소[牛]를 이용하여 비약적인 수확량 증대를 이루었다. 이러한 잉여농산물과 생활용품 등을 중국 전체에 유통시키기 위해서 상공업이 발달하여 청동화폐의 등장을 가져왔다.

또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주 왕조의 봉건제 등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개인의 토지소유도 가능해졌으므로 전국칠웅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분이나 출신에 구애받음이 없이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여 국가를 경영하였고, 많은 현자들이 등장함으로써 사상계의 전성기인 '제자백가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 시스템의 변화가 이러한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국칠웅은 자국의 영지 내에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토지와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무너진 봉건제도 위에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치가 가능한 군현제(郡縣制)로 바꾸어 놓았다.

동양사상의 근본 뿌리, 제자백가
이 당시 중국은 고사성어와 한자숙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사상과 학문이 태동기였으며 때마침 서역 저편에서도 그리스 문화의 꽃이 만개하고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이 융성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농업혁명은 생산성의 향상과 부대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져서 상업활동을 촉진시켜 도시가 발달하고 도시를 거점으로 각 국은 서로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군량미를 비롯한 전쟁물자 조달에서 '물류'도 생겨났고 각국은 앞 다투어 방어를 위한 성을 쌓음으로써 토목기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농업과 상업, 본격적인 철기문화와 토목기술은 더 이상 중국을 조용한 대륙으로 방치하지 않았다. 특히 제반 산업을 유통시키는 상업은 이미 춘추시대 제나라의 환공이 중국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 그의 책사였던 관중(管中)이 중상주의 정책을 부국강병책으로 시행한 바 있었다. 이렇게 중국 사회에 불어 닥친 모든 변화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사상의 발달'을 가져왔다.

춘추시대부터 시작하여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동하였고 자신이 품고 있었던 정치적 소신을 펼치고자 각국의 조정에 책략가로 출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생기고 발전한 여러 사상은 수천 년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동양사상의 근본 뿌리를 형성하였고, 우리는 이를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라 한다. 필자가 동양사상의 뿌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실상 그 당시에 형성된 사상을 시대에 따라 재해석하는 과정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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