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사 자녀의 입시 관련 의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를 계기로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이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그동안에도 ‘학종’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번 일이 국민들에게 던진 파문은 예사롭지가 않다. 실제로 최근에는 ‘학종’을 폐지해야 한다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교육부가 나서서 확실하게 감독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학종’이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학입시에 대한 ‘기본 국민정서’인 ‘공정성 원칙’에 어긋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입시의 공정성에 대해 다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민감하다.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대학입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실시되었던 ‘과거제도’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제도의 핵심적 조건, ‘공정성’ 과거제도는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신분 개방이었다. 원래 과거제도를 실시하려고 했던 목적은 귀족세력을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귀족가문에서만 관리를 뽑던 것을 평민들에게까지 그
조선시대 선비들은 무엇 때문에 과거합격에 매달렸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질문에 관해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답이 뻔하기 때문이다. ‘부귀영화’, ‘입신양명’ 등의 단어는 ‘왜 과거합격을 하려고 했는지’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구태의연한 질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교육을 실제로 굴러가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바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교육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적확(的確)한 규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교육과 지금의 우리 교육 사이에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벼슬’ 보다 중요했던 과거합격 콤플렉스 그렇다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하려는 이유가 앞서 언급한 부귀영화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었을까? 우선 부귀영화나 입신양명이란 말의 핵심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명예’와 ‘부’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합격하게 되면 벼슬이 주어지게 되고, 동시에 그 지위에 상응하는 명예와 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은 학원 공화국이다. 그중에서도 대세는 역시 입시학원이다. 서울의 대치동, 목동, 중계동 등 대표적인 학원 밀집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 입시학원들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원들은 과연 언제부터 성행하게 되었을까? 사실 이에 대한 해답을 추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러한 학원들이 성행하게 된 배경이 입시라는 점에 착안한다면, 결국 시험이 도입된 시대와 학원의 등장이 맞물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답은 바로 과거시험이 도입되었던 고려시대이다. 혹자는 고려시대에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있었을 것이고, 그곳을 중심으로 과거 준비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물론 학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교가 바로 국자감이다(국자감은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같은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최고 수준의 공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국자감에 학생들이 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 성종 때 기록 중에는 학생들이 국자감에 적만 걸어두고 실제로 다니지 않는다는 탄식이 나온다. 문종 때는 국자감 학생들이 학업을 전폐하게 된 것은 교관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인성함양’이라는 것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교육에서 가장 많이 비판받아 왔던 부분 역시 ‘인성교육의 부재 또는 실종’이었다. 인성교육이 땅에 떨어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믿음 중 하나는 ‘조선시대 선조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노력을 계승하고, 그 방법을 적용한다면 인성교육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지금까지의 학술 연구들에서도 조선시대 인성교육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당시의 인성교육은 하나의 전범(典範)처럼 간주되고, 나아가서는 자긍심을 갖게 하는 신화와 같은 성격마저 띠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점이 있다. 지금 우리의 인성교육 발목을 잡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입시위주 교육’이다. 조선시대 역시 ‘과거 합격’이 지상 목표였던 ‘과거시험 위주의 교육’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에서의 인성교육이 성공적으로 구현될 수 있었을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의 인성교육은 과연 우리의 모델이었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대부분 사람의 생각 속에는 선비들 하면 으레 올곧은 삶의 표본으로 각인되어 있어, 선비들의 공부 자세 또한 대단히 모범적이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우문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선비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선비는 기본적으로 과거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수험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비들이 어떻게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는가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사실(史實)들이 비로소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된다. 벼락치기 공부를 하다 그 중 먼저 언급할 것은 임기적(臨機的) 학습이다. 이는 시험 때에 닥쳐서 학습한다는 것으로서, 평소에는 학습에 치중하지 않고 있다가 과거시험 때가 다가오면 그때 가서 급하게 공부를 하는 행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선비들이 어떻게 벼락치기 공부를 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가을에 초시를 실시하고 봄에 이르러 복시를 실시하기 때문에, 유생들이 겨울 3달 동안에 기억하고 외우면 요행으로 과거에 뽑힐 수 있다고 여겨 모두 제술에 전념하고 경전 학습
요행이란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을 넘어선 뜻밖의 행운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행은 조선시대 수험생들에게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어서 당시 교육 문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 요인이었으며, 조선시대 교육이 안고 있던 최대 고민 중의 하나였다. 이처럼 요행은 조선시대 교육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였다. 요행을 기대하는 것은 일부 수험생들에게나 해당되는 현상으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행심리가 당시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에게 내재되어 있었는가를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혹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요행에 의존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과거에 합격한 수험생들이어야 한다고 강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수험생 중에서 요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의 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별시(別試), 요행심을 부추기다 조선시대 유생들에게 요행심을 불러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별시(別試)였다. 별시란 과거의 변종으로서, 과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도 실시되지 않았던 특별시험이었다. 정규시험인 식년시(式年試)가 7단계의 복잡한 시험을 거쳐야 합격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별시는
성균관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재학생 수에 관한 것이다. 흔히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로서 당시 수재들의 집합소이자 모든 학생들의 로망이었던 곳, 그래서 성균관은 언제나 학생들로 미어터졌던 공간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성균관의 실제 재학생 수는 가히 충격적이다. 성균관의 재학생 정원이 20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재학했던 학생 수는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한두 명에 불과하였다는 내용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심지어 재학생이 하나도 없다는 한탄들도 발견된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일까?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다. 당시 성균관은 어떤 곳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죽어 나가다 조선시대 성균관에 관한 기록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학생들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대략적이나마 가늠하게 한다. 성균관 학생들이 여러 번 부종병으로 죽게 되어 저희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 (중략)… 한 자리에 오래 앉아서 글 읽기만 힘쓰므로, 정신이 피로하고 기운이 떨
조선시대 교육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초집(抄集)이다. 초집이란 ‘좋은 글들을 모아놓은 서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초집은 ‘주로 과거시험에서 출제 가능성이 높은 글들의 모음집’, 다시 말해서 예상문제집을 의미했다. 여기에는 고금의 유명 인사들의 글이나 과거 응시생들이 지은 글 중에 평판이 좋은 글, 그리고 기출문제에 대한 모범답안 글들이 주가 되었다. 혹자는 오늘날의 예상문제집을 떠올리면서, 초집에 대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집은 단순한 사안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당시 교육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바로미터로서 교육문화의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집은 얼마나 성행하였을까 우선적으로 확인할 것이 있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초집이 얼마만큼 성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다음 기록은 그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온 나라 자제들이 …(중략)… 초집만을 과거공부의 좋은 수단으로 여겨 책자로 만드는 경박한 풍습이 굳어져 비록 금지하는 법이 있어도 이제는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세종실록 권77, 19년 6월 기미 이처럼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