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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의 과거시험 컴플렉스

조선시대 선비들은 무엇 때문에 과거합격에 매달렸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질문에 관해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답이 뻔하기 때문이다. ‘부귀영화’, ‘입신양명’ 등의 단어는 ‘왜 과거합격을 하려고 했는지’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구태의연한 질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교육을 실제로 굴러가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바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교육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적확(的確)한 규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교육과 지금의 우리 교육 사이에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벼슬’ 보다 중요했던 과거합격 콤플렉스

그렇다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하려는 이유가 앞서 언급한 부귀영화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었을까? 우선 부귀영화나 입신양명이란 말의 핵심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명예’와 ‘부’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합격하게 되면 벼슬이 주어지게 되고, 동시에 그 지위에 상응하는 명예와 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연 그랬을까?

 

먼저, 과거합격에 목을 맨 이유가 벼슬을 얻기 위한 것이었을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예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당시 높은 직급의 수령 중에는 흔히 소과라 불렸던 생원·진사시에 응시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는 것이다. 이미 벼슬에 오른 관리라면 과거시험에 응시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다음과 같은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

 

어진 이를 구하는 방법을 오로지 과거시험에만 의지하게 되어, 이 길로 출세하지 않으면 인재가 아니라 일컬어 손가락질하고 으레 속된 벼슬아치로 대우합니다. -성종실록 12년 5월 신축

 

당시 사회는 아무리 높은 관직에 올랐다 하더라도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았다면 손가락질당할 수밖에 없었던 풍조였다. 결국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관리가 된 사람 중에서 많은 수가 과거시험, 그것도 소과에라도 응시하려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풍조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하려 했던 이유가 오로지 벼슬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심지어 벼슬을 얻는 것보다 (설사 나중에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과거합격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관한 단적인 예를 들면, 사면된 죄인에게 왕이 벼슬을 제수할 때는 아무 문제 없다가도 과거응시를 허용할라치면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당시에는 벼슬보다도 과거합격이 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과거합격의 중요한 목적이 부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하면 일정한 토지와 함께 곡식 등의 현물을 지급받았다. 토지는 땅 자체를 하사받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소출에 대한 일정 비율의 세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혜택을 일률적으로 많다 적다 할 수는 없지만, 설사 가난한 선비가 장원급제했다 하더라도 그가 매년 받게 되는 쌀 30~57석과 약간의 곡식들이 팔자를 고칠 만큼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관리들 녹봉이 박하다’는 중종 때의 기록에서 보듯이 관직에 오른다고 해도 경제적으로는 별 볼 일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과거급제가 곧 커다란 부를 안겨주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과거합격에 매달렸던 진짜 이유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합격이 대단한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비들은 어째서 그토록 과거합격에 매달렸을까? 여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가문 유지였다. 여기서 말하는 가문이란 당연히 양반 가문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은 양반들뿐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양반 가문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과거시험은 거의 양반들만의 리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양인들은 법제적으로는 응시자격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어서 실제로 응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조(四祖: 친가 쪽 3대 즉, 부·조·증조와 외가 쪽의 외조) 안에 관직자가 있거나, 최소한 소과 합격자(생원 또는 진사)라도 있어야만 그 집안은 양반 가문으로 인정되었다.

 

다음으로 과거에 합격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는 ‘학생’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차례나 제사를 지낼 때 ‘학생부군신위’라고 쓴 지방(紙榜)이나 ‘학생이라는 호칭이 적힌 묘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이 없거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이름 앞에 ‘학생’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이처럼 ‘학생’은 명예롭지 못한 호칭이었다. 따라서 어떻게든 떼어내야만 했고, 관직을 얻거나 과거(소과도 포함)에 합격하게 되면 ‘학생’을 면할 수가 있었다. 소과에 합격하게 되면 ‘학생 홍길동’이 ‘생원(진사) 홍길동’으로, 대과에 합격하면 ‘급제 홍길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과거합격을 해야만 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과거합격이 곧 학력(學歷)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학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학교 졸업이 아니라 과거합격 여부였다. 당시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을 졸업했다 하더라도 학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보다는 대과에 합격함으로써 받는 칭호인 ‘급제’, 소과에 합격해 받은 ‘생원·진사’가 지금의 학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윤초시댁의 ‘초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학력이 한 개인의 인간됨이나 도덕성을 판단하는 잣대였다. 이는 당시 책들이 대부분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선비들은 어떻게든 과거에 합격하려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합격에 매달렸던 이유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로서 ‘방방(放榜)’과 ‘유가(遊街)’를 들 수가 있다. 방방은 합격자 발표의식으로 대궐에서 왕이 직접 합격자들에게 합격 증서를 하사했던 성대한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합격자 가족과 친지들의 참석이 허락되었는데, 합격자를 호명하면 부형과 친척들이 따라 들어와 왕에게 절을 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합격자를 호명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을 먼저 부르게 되어 있었다. 또한 유가는 합격자들이 시가 퍼레이드를 펼치는 행사였다. 이때 합격자들은 관복과 함께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햇빛가리개를 한 채 나라에서 마련해 준 말을 타고 가족과 친지와 함께 시내를 행진했다. 이처럼 방방과 유가는 합격자 본인이나 부모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행사였다. 이 때문에 당시 부모들의 로망은 장차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여 영광을 보는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자식들 또한 부모가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과거에 합격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요컨대 과거합격은 자식이 부모에게 실천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 방법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연결고리, 학력이 곧 ‘인간의 조건’

결국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합격에 목을 맸던 이유는 관직을 얻음으로써 대단한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인정을 통해 당시 선비들은 비로소 원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고, 이 점에서 과거합격은 그 시대 인간의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당시에는 소과에만 합격해도 이러한 조건을 취득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양반은 힘든 대과를 포기하고 생원 및 진사로 남으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어떤 나라들보다도 대학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 그럴까? 흔히들 대학입학의 이유를 취업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고,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그것 때문만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대학입학 경쟁을 주도하는 집단이 바로 우리나라 최고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는 강남 학부모들이라는 사실, 특히 굳이 취업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부자들도 자식들의 대학입학에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은 곧 대학입학이 취업에서의 효용성 말고도 다른 중요한 이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대학졸업이 이 시대 인간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과거합격에 매달렸던 이유와 오늘날 대학에 목을 매는 이유가 정확하게 겹쳐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희미하게나마 둘 사이에 연결선을 그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구한말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종전 과거합격이 지녔던 의미를 근대식 학교 입학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 오늘날까지 진학열이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그 둘을 연결 짓는 것이 너무 무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우리나라가 왜 세계에서 대학 진학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거운가? 더군다나 대학졸업이 갖는 취업 메리트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열의가 식지 않고 있는가? 이제 이와 같은 궁금증이 다소나마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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