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재학생 수에 관한 것이다. 흔히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로서 당시 수재들의 집합소이자 모든 학생들의 로망이었던 곳, 그래서 성균관은 언제나 학생들로 미어터졌던 공간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성균관의 실제 재학생 수는 가히 충격적이다. 성균관의 재학생 정원이 20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재학했던 학생 수는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한두 명에 불과하였다는 내용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심지어 재학생이 하나도 없다는 한탄들도 발견된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일까?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다. 당시 성균관은 어떤 곳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죽어 나가다
조선시대 성균관에 관한 기록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학생들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대략적이나마 가늠하게 한다.
성균관 학생들이 여러 번 부종병으로 죽게 되어 저희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 (중략)… 한 자리에 오래 앉아서 글 읽기만 힘쓰므로, 정신이 피로하고 기운이 떨어져서 병이 깊어 감을 알지 못하다가 죽기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종실록, 3년 8월 24일 갑인
학생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은 부종병이었으며, 이러한 일이 한두 번에 그쳤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해 부종병을 얻었다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점점 악화돼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이 이 병에 걸렸을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균관의 생활여건과 관련이 있다(원래 조선 초기부터 학생들이 성균관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수학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성균관 기숙사 시설과 식사는 어떠했을까?
기숙사에 온돌방이 없었다. 조선시대 성균관 기숙사 방은 온돌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소목(燒木·땔감)의 부족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국가 전체가 소목의 확보가 여의치 않아 궁궐에서조차 온돌방을 최소화하였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이 거처하는 기숙사 방에 온돌을 들이기가 쉽지 않았고, 그 대신 판방(板房), 다시 말해서 마루로 된 방을 만들었던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기숙사에 온돌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한두 개 정도는 마련해 두었다. 이는 환자들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건실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일 년 중 난방을 해야 할 날들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성균관 학생들은 추운 날에도 어쩔 수 없이 마루방에서 잠을 자면서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야만 했던 것이다.
늘 끼니가 부실하였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그래도 명색이 국가의 최고학부라고 했던 성균관 학생들에게만큼은 매끼 성찬은 아니더라고 최소한의 찬거리는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식사는 다음과 같이 부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가 그 빠른 벼슬길을 버리고 오래도록 성균관에서 고생하며, 아침에는 나물죽을 먹고 저녁에는 소금밥을 먹는 괴로운 길을 택하려 하겠습니까?- 중종실록, 10년 윤4월 23일 경진
이처럼 성균관 학생들은 ‘나물죽’과 ‘소금밥’이라는 식단이 보여주는 것처럼, 최소한의 반찬조차 제공되지 않는 부실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질병에 시달리다
이처럼 열악한 주거 환경과 식사 여건에서 생활하다 보면 신체적으로 무리가 따르게 되고, 이로 인해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당시 성균관에서 기거했던 학생들은 다양한 질환에 걸렸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질환들은 앞서 언급한 부종병 외에 주로 풍습병(風濕病)·습질(濕疾)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병의 증상은 대체로 온몸의 관절이 붓고 아프며 열이 나는 것으로서 성균관 유생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던 부종병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풍습병이나 습질 증상은 오늘날 류머티즘이나 관절염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통증은 일반인들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성균관 교관들
생활여건이 힘들었어도 만일 성균관에 실력과 열의를 가진 교관들이 있었다면 과거시험 합격을 목표로 하였던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고생을 감내하면서라도 재학하려 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런데 당시 성균관 교관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성균관은 인재를 교육시키기 위한 곳인데, 교관들이 대부분 합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늙고 병든 사람이 아니면 거의 다 인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명종실록, 19년 2월 계축
최고학부라는 위상에 걸맞게 성균관 교관은 최고의 인재들 중에 엄선하여 임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이처럼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교관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아예 교관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교관직이 한직으로 여겨져 모두가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은 어려운 여건을 견디면서까지 성균관에서 수학할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학생들은 성균관 입학을 기피하였다. 이로 인해 성균관이 부실하게 될 수밖에 없었고 국가에서는 학생들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원점법(圓點法)’이었다. 이 법은 소과 합격자의 경우 원점(성균관 식당에서 아침 및 저녁식사를 하고 출석부에 서명하면 동그라미 한 개를 받도록 되어 있었음)이 300개가 있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다는 규정으로서, 쉽게 말해 일종의 강제입학규정이었던 셈이다.
편법으로 성균관 수학을 모면하다
그러나 성균관의 시설이나 생활조건은 그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학생들의 고충은 종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성균관 재학을 모면하기 위한 다양한 편법을 동원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부모의 병을 핑계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원점법에는 예외 규정이 있었는데, 부모가 병이 생겨 학생이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경우 원점을 면제해 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 규정을 악용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즉, 웬만큼 권세가 있는 집안에서는 부모가 병이 들었다는 증명서를 허위로 발급받아서 제출하는 경우들이 많았던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낮은 관직이라도 얻어 성균관에 기숙하지 않고 대과에 응시하려는 경우인데, 왕과 궁궐을 호위하는 직책을 얻거나 혹은 지방 교관직에 임명되면 원점 없이도 응시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상태에서 대과에 합격하게 되면 직급이 몇 단계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소과 합격자들이 이러한 방법을 선호하였다.
세 번째는 부정출석 행위로서, 다른 사람을 시켜 출석부에 대리 서명하게 하거나 출석부의 숫자를 위조하는 경우(예를 들어 ‘一’을 ‘十’으로 고치는 것) 등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조선시대에 학생들이 성균관에 적극적으로 입학하려 했을 만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따라서 성균관이 늘 학생들로 붐볐을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서 환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허위 증명서를 발급받거나 낮은 관직도 얻을 만한 ‘빽’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던 소수의 한미한 집안 출신 학생들로 명맥을 유지하였다는 것, 바로 이것이 조선시대 최고학부 성균관의 민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