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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의 품격

욕이야말로 잘해서 본전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욕은, 궁극에는 욕한 자신이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팔 걷고 거센 욕설로 해 붙일 때는, 일견 상대를 향해서 통렬하게 날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욕이 고스란히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독한 욕설로 악다구니처럼 몰아붙여 상대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희열에 가득 찬 승리감을 맛보는 것일까.



인간문화재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했던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1907~1974)옹의 일화이다. 그가 만년에 병고와 외로움으로 시달릴 때, 몇몇 제자들이 찾아와 스승의 형편을 어렵사리 보살폈다. 그런데 지난 날 김연수 선생의 총애를 크게 입어 출세한 제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스승의 어려움과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찾아오기는커녕 도대체 안부 인사 한번 없었다. 주변에서 그 제자의 그릇됨을 탓하며, 선생에게 그를 불러 한번 호되게 나무랄 것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동초 선생이 하셨다는 말씀이 걸작이다.
“내 그 녀석을 불러 욕을 바가지로 해 주려다가, (혹시라도 내 욕을 듣고 뉘우쳐서) 그 놈 사람 될까 싶어서 그만 두었네.”
이쯤 되면 욕의 기술과 품격이 경지를 넘어선다. 직접 욕설을 건네지 않았으면서도, 훨씬 더 짜릿한 울림을 전한다. 판소리 명인다운 말의 경륜이 묻어 있다. 말[言語]이 주인을 제대로 만나, 그 장면에 마땅한 의미의 울림을 기막히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연수 선생의 욕이 짜릿한 설득력과 지적 운치를 획득하고 있는 것은 그가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미 욕 자체로부터 저만치 벗어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수준의 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인상을 긁어대면서 거세고 할퀴고 질펀하게 내뱉는다고 해서 일품의 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욕이야말로 잘해서 본전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욕은, 궁극에는 욕한 자신이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팔 걷고 거센 욕설로 해 붙일 때는, 내 입에서 나온 욕이 일견 상대를 향해서 통렬하게 날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욕이 고스란히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독하고 독한 욕설로 악다구니처럼 몰아붙여 상대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희열에 가득 찬 승리감을 맛보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안에서 나오는 스스로의 쓴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고약한 것은 자식 야단치면서 감정에 휘둘려 욕설을 퍼붓는 경우이다.
“아! 나는 고작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욕으로 얼룩지는 싸움에는 절대로 이기는 사람이 없다. 물론 얻는 것도 없다. ‘상처뿐인 영광’이라도 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오욕뿐인 상처’를 면하기 어렵다. 옆에서 구경하는 제삼자의 자리에서 보면 이 점은 더 명료해진다. 백이면 백, 다음과 같은 모욕적 평가를 피해 가지 못한다.
“에이! 그 사람 욕하는 것 보니 못 쓰겠더라.”
“두 놈 모두 다 똑같다 똑같아!”
그러고 보니 욕이란 망가지는 과정의 시발점을 제공한다. 흉하게 망가지지 않으려는 생각을 한다면, 욕에도 품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욕쟁이할머니들의 경우(특색 있고 맛있는 음식으로 식당을 하시며, 손님들에게 질박한 욕을 잘해서 유명해진 할머니들)에도 그 나름의 욕 철학은 있다는데,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될성부른 놈들에게만 욕을 한다’고 한다.

욕은 어디서 생겨나오는 것일까. 전혀 다듬지 않고 길들이지 않은 인간 본성의 언어가 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욕은 보기에 따라서는 질박(質朴)함의 매력을 준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張吉山)’에 나오는 그 푸짐하고도 조야함 그대로인 욕들은 원초적 자연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읽게 해 준다. 교육이니 교양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으로부터 문화적 가공을 전혀 받지 아니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문학적 의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리얼리즘 문학예술의 영역이고, 막상 구체적 교실에서 구체적 학생을 교육시키는 장면에서는 욕이 미화될 수 없다. 욕을 몰아내어야 한다. 욕은 분명 사람의 나쁜 본성과 결부된 것이고, 사람의 나쁜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바로 교육이기 때문이다. 욕은 원시적 욕구와 깊은 상관을 가진다. 욕구의 좌절이 욕을 부른다.
나는 만약 ‘욕의 나라’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나라는 ‘교육의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욕의 사용은 문맹률과도 높은 관계를 갖고 있다. 문자(쓰기) 문화가 취약한 곳에 욕설이 기승을 부린다. 또 욕은 부정적인 면에서 가정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긍정적인 면에서 학교교육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교육적으로 상당한 진화를 해 온 셈이다.
치유 상담 전문가인 정태기 교수는 말한다. 사람의 모든 내적 상처의 근원과 불행의식 속에는 언젠가 그 사람을 할퀴고 갔던 누군가의 욕설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자랐던 50년 전 섬마을 가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어른이나 아이나 일상의 생활언어 자체가 거의 욕이었다고 말한다. 5학년 때, 의식 있는 젊은 선생님이 오셔서 일체의 욕설을 금지하는 강력한 지도를 하셨단다. 늘 생활언어처럼 사용하던 욕을 하지 말라니, 그 욕 안하기가 얼마나 불편하고 낯설었는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욕을 일체 쓰지 말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주고받는 말을 무조건 영어로 하라는 것처럼 어렵고 힘들고 낯설었습니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50여 년 전, 우리 농어촌 아이들이 겪는 언어생활의 평균적 모습이 이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아이들의 언어생활에서도 욕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정태기 교수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교육이 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교육의 진화를 엿볼 수 있는 여실한 대목이다. 또 그만큼 우리 교육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욕하는 사회’를 조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욕먹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이다. ‘욕이 배따고 들어오나’하는 사회 심리의 풍조가 바로 그것이다. 스트레스 안 받고 살겠다는 전략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왠지 ‘자존(自尊)’의 가치를 스스로 팽개치는 것 같아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심리에는 ‘욕먹어도 돈만 많이 벌면 됐지’하는 천박한 물질 만능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까짓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 우리 모두 함께 천박해지자는 뻔뻔스러움이 끼어들어 있는 것이다. 철판같이 두꺼운 뻔뻔스러움이라 제법 강할 것 같지만, 의외로 약하다. 돈이 부리는 대로 온갖 망가지는 곤욕을 다 겪으면서도 막상 본인만 그것을 모르니 불쌍하기까지 하다.
근자 청소년의 욕 습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영화를 꼽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영화에 조직 폭력을 다룬 영화가 약 10여 년 이상 일정한 흐름을 형성했는데, 그 중에는 학교와 조폭의 결합을 다룬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영화에서 욕들은 충동적 기제를 극대화 한다. 그리고 감정 배설의 도구로 쓰인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나쁜 본성’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욕은 모방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또 쉽게 상투적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욕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아니 욕은 폭력 이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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