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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握手) 해부하기

악수는 ‘사람 만나기 기호’이다. 그런데 이 악수라는 것이 유독 어른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수란 그만큼 인간의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행동 양식이란 뜻 아니겠는가. 악수하는 행위 속에는 정치의 코드도 잠복해 있고, 비즈니스의 심리도 숨어 있고, 복잡한 이해관계의 계산법이 묻어 있다.



력한 개혁 리더십으로 중국을 이끌었던 등소평(鄧小平) 주석의 악수하는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그가 외국의 국가 원수들과 악수하는 장면을 보면, 팔은 제자리에 두고, 손목만 조금 내밀어, 그것도 아주 조금만 내밀어 악수를 한다. 당연히 상대가 반걸음 더 다가오게 된다. 워낙 단구(短軀)의 체격이라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악수 자세가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등소평 식의 ‘악수의 철학’이 작동했을 법하다.
작은 체격이지만 조금도 꿀릴 것 없다는 의식,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다는 심리 등이 그의 악수 스타일 속에 있을 법하다. 또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향하여 다가오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심리적 제압 효과 등이 무의식중에 작동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등소평이 정치적 부침(浮沈)의 과정에서 얻었던 별명이‘작은 거인’인데, 그가 악수를 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정말 ‘작은 거인’같다는 느낌이 든다.
악수는 본래 서양의 풍습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화된, ‘인사의 양식’으로 굳어졌다. 점잖은 신사들이 그럴듯한 자리에서 악수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면, 매우 고상한 행동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악수의 연원은 싸움과 복수가 일상화 되어 있던 야만적 힘의 시대로 거슬러 간다. 내 손에 당신을 해칠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확신시켜 주는 데서 생겨나 발전해 온 것이 악수라고 하니 말이다.
연원이 그러하니 악수는 생겨날 때부터 강한 사회성의 동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사회가 변화, 발전하면서 악수는 훨씬 복잡다단한 바코드가 되었다. 오늘날의 악수라는 바코드에는 여러 가지 심리적 사회적 의미들이 숨어 있다. 어찌 입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는 것만이 말이겠는가. 악수는 어떤 말보다도 울림이 다양한 말의 일종이다. 알고 보면 악수처럼 섬세하고 미묘한 언어가 따로 없다.

굳고 세게 손 전체를 꽉 잡아서 흔드는 악수는 믿음과 기대를 담아 보내는 악수이다. 만남과 사귐에서 적극성을 띠려는 의도가 강한 사람일수록 손을 잡아 쥐는 힘이 세다. 이런 악수를 하는 사람은 정이 많고 의리가 강한 스타일이지만, 더러는 도가 지나쳐 일방적일 수도 있고, 외골수일 수도 있다. 성격과 상관없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과업이 중차대할 때도 악수하는 손에 힘이 가게 마련이다. 이런 악수는 더러 상대에게 기(氣)를 옮기기도 해서, 상대도 덩달아 손을 흔들어 대게 한다.
쥐는 듯 마는 듯 약하고 희미하게 잡는 악수는, 악수에 도가 튼 고수들의 악수일 가능성이 많다. 잡혀 주는 악수인 셈이다. 아니면 회피하고 싶은 악수일 수도 있다. 물론 부드러운 악수와는 구별된다. 성격이 수줍고 소극적이어서 이런 스타일의 악수를 한다면 고쳐야 한다. 상대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악수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쪽에서 매우 적극적인 악수를 내밀었는데 상대가 이런 반응으로 악수에 응하면 김이 샌다.
오래 잡고 흔드는 악수는 그만큼 감회와 인정이 각별하다는 것을 뜻한다. 악수하는 동안 주고받는 말에도 인정이 묻어나면서 이런 악수는 감동을 연출한다. 긴 세월 헤어졌다 극적으로 만나 사람들 사이의 악수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다시 왼손까지 동원하여 상대방의 손을 쓰다듬는 데까지 이르면 절정에 이른다. 이런 악수가 문제일 때도 있다. 남성 이 여성에게 악수를 하면서 오래 손을 붙잡고 쓰다듬고 있으면 보기에 민망스럽다. 악수가 금방 추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악수는 쌍방이 감정을 조화롭게 공유함으로써 빛나는 것이다.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는 동안 왼손으로는 상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는 것은 아랫사람을 격려하는 윗사람의 악수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권력자들이 보여주던 악수 모델이다. 윗사람의 악수가 꼭 이래야만 하는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유형의 악수를 아무데서나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부장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더라도 격려하고 고무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꼭 같은 이유에서 머리 조아려 가며 두 손으로 하는 악수도 문제가 있는 악수이다. 애당초 악수는 오른손과 오른손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여기에 몸을 지나치게 굽혀 상대의 손을 두 손으로 받아 악수하는 모습은 왠지 비굴해 보인다. 이는 전근대적 모습이다. 적어도 악수 그 자체에는 달리 차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악수하면서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 악수는 결례의 악수이다. 좋은 악수는 손이 만나는 동안 눈도 함께 만나는 악수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악수의 본질을 망각한 악수는 ‘사진 찍기 위한 악수’이다. 정치인들이나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 무슨 회담이나 무슨 회동이 있을 때, 카메라맨을 위하여 악수하는 장면을 연출해 주는 것이 사진 찍기 위한 악수이다. 요즘 카메라 폰이 일반화 되면서 ‘사진 찍기 위한 사진’을 찍는 장면을 다시 사진으로 찍어 여기저기 올리는 것을 보게 된다. 악수의 부자연스러움이 몽땅 모여 있는 것이 바로 사진 찍기 위한 악수이다. 그런데 이 사진 찍기 위한 악수가 흔해지면서 이걸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없는 세태가 되었다.
악수하는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경우는 악수가 억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협박을 당하며 강제로 요구되는 악수는 땀이 난다. 조폭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결혼을 한사코 반대하는 상대방 어른들을 대면하러 간 자리에서의 악수는 땀이 난다. 생사가 걸린 담판이나 협상의 장면에서 오가는 악수는 손에 땀을 쥐지 않을 수 없다. 내 손에 땀나는 것을 상대가 알아차릴까, 불안이 가중된다. 그러나 이 고비를 이겨내지 않고서는 무엇 하나를 제대로 이룰 수 있을까. 악수를 움츠리면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무안하기 짝이 없는 악수는 거부당하는 악수이다. 내가 내민 손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는 상대방, 그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그야말로 뼈아픈 경험으로 남는다. 악수를 거부당한 쪽은 수치심과 원망감이 마음에 사무치고, 거부한 쪽은 지금껏 마음에 품어 왔던 적개심을 한층 매섭게 확인한다. 저들 두 사람은 다시 화평의 악수로써 만날 수 있을까? 악수가 ‘내 손에 너를 해칠 흉기가 없다’는 뜻이라는데, 이제 저들은 손 안에 무슨 무기라도 들고 만날 것인가. 악수를 거부하는 순간, 이미 마음의 독기(毒氣)를 무기처럼 상대에게 날려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처를 상대의 마음에 각인한다. 그것이 훗날 몇 배는 더 강한 독기로 되돌아 와 나를 다치게 하는 상처로 올 것을 왜 모르는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내미는 악수를 웬만하면 거부하지는 말 일이다.
환상 같은 악수의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오래 간직하고 살 일이다. 대학 졸업 후 군대 다녀오고, 그러던 무렵, 오래 못 본 동창 녀석의 결혼식장. 옛날의 그 친숙함이 약간은 낯설어진 듯한 옛 친구들과 애써 우정의 분위기를 띄우며 부산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식도, 피로연도 끝나고 예식장 모퉁이를 혼자 돌아 나오는 길목에서 홀연 소리도 없이 누군가 내미는 흰 손이 있다. 학창시절 동아리 후배 여학생이었던 그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어디쯤서 아름다운 잔상으로 남아 있던 얼굴, 그녀가 악수의 손을 내민다. 초여름 녹음 아래 그녀는 머리를 가볍게 숙이고 있지만 시선은 살풋 들어 내 눈에 맞추며, 악수의 손을 오래 내밀고 있다. 그래서 악수는 운명이 되기도 한다. 아름답고 소중한 악수의 환상이다.

어른들에게는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없는 신체적 대화 중에 악수와 키스가 있다. 타인을 만나서 상호 교섭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악수와 키스는 공통점을 가진다. 악수가 공공연한 과시를 바탕으로 한다면, 키스는 은밀한 숨김을 바탕으로 한다(요즘은 딱히 그렇지도 않지만). 악수가 사회·문화적 맥락을 수반하는 행위라면, 키스는 심리적 맥락에 닿아 있다.
아이들은 악수가 필요 없다. 초면일지라도 그냥 얼굴 보며 익히는 것으로 인사가 되고, 평소 알고 지내는 아이들끼리는 만날 때 이름 한번 부르는 것만으로 반가움이 전달된다. 아이들이라고 악수를 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만, 그래서 굳이 악수를 해 본다고 쳐도 아이들의 악수는 어설픈 어른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악수란 원래 천진난만함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도 다음에 어른이 되면 뻔질나게 악수를 할 것이다.
악수는 ‘사람 만나기 기호’이다. 그런데 이 악수라는 것이 유독 어른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수란 그만큼 인간의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행동 양식이란 뜻 아니겠는가. 악수하는 행위 속에는 정치의 코드도 잠복해 있고, 비즈니스의 심리도 숨어 있고, 복잡한 이해관계(利害關係)의 계산법이 묻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악수는 다분히 남성 문화의 일단으로 비쳐진다. 여성들은 남성만큼 악수를 하지는 않는다. 처음 만난 사이이면 웃음을 띤 가벼운 목례로 인사가 이루어지고, 오랜만에 만나 많이 반가우면, 두 손을 오래 맞잡고 호들갑을 부리는 것으로, 충분한 감정의 소통을 이룬다. 그렇게 보면 남성들의 악수는 ‘인사하기 위한 인사’라는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악수가 남성들의 사회적 일상과 더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투성을 띠고 있다는 뜻도 된다.
파티도, 모임도, 회의도 악수로 시작해서 악수로 끝난다. 여행도, 연애도, 경기(競技)도, 선거 유세(遊說)도 악수로 시작해서 악수로 끝난다. 악수로 점철되는 인생이다. 그럴수록 악수의 진정성이 문제다. 악수의 진정성, 이것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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