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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은행나무와 아이들을 보며

까르르 까르르! 한기 속 하얀 입김도 뒤로한 채 아이들은 은행잎 한 아름 파란 하늘에 뿌린다. 웃음은 노란빛 물들어 나비가 되어 팔랑거리며 쏟아진다. 12월이 시작되었다. 아직 겨울이라고 말하기엔 가을 시간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묻어 있다. 갈바람에 말라서 신음하는 억새꽃, 잿빛으로 갈무리되어 투명한 물소리에 숨죽이는 갈꽃의 너울거림, 상수리 숲 바스락거림에 낙엽 마르는 냄새. 계절의 변화를 가을 끝 겨울 시작이란 단절음으로 말하는 것은 나만의 억척이 아닌가 싶다.

 

 

운동장 넓은 시골 학교의 가을을 황금빛으로 거두는 은행나무 8그루가 운동장 남쪽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다. 11월 초입에는 푸른색이 많더니만 12월을 앞두고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출근할 때마다 노란빛의 진해짐을 사진으로 담는 게 소소한 두근거림이 되었다.

 

은행나무가 내려다보는 운동장은 통학버스가 도착하여 아이들의 발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늦잠을 자고 있다. 12월 첫날 아침은 빙점으로 시작된다. 갈색 바랜 잔디에 쌓인 가랑잎과 두터운 은행잎들은 서리로 덮여 있다. 사그락 바사삭, 밤새 쌓인 은행잎 낙엽 위로 걸음을 옮긴다. 얼마 만에 낙엽 밟는 소리를 듣는 걸까? 잠깐 고개 들자 파란 하늘에 담긴 노란 은행잎의 미소가 상큼한 아침 공기를 베어 물게 한다. 모니터만 보던 목과 어깨가 아프다고 아우성친다. 11월의 마지막 날은 늦가을 속에 찾아온 한기가 서리를 내리게 했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은행잎은 더 물들었다. 사그락사그락 소리도 부드럽다. 밤새 노란 잎들이 겹겹이 솜이불 같다. 그네가 있는 지붕, 탁자와 의자에도 소복한 노란 잎들이 곤히 잠들어 있다. 그 노란색에 이끌려 셔터 누르기에 바쁜데 후두 둑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하늘이 이렇게 파란데 무슨 비? 아니다. 그 소리는 밤새 서리로 무거워진 은행나무가 잎을 버리는 소리이다. 가는 가을 색이 아쉬워 이 소리까지 순간에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져본다. 울리는 내 발소리를 들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간다. 현관에 서서도 계속 은행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제 저 풍경 볼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매단 잎들을 모두 떨구고 나면 나목으로 남아 긴 겨울의 묵념 속에 봄을 기다릴 것이다.

 

폭신한 은행잎이 전하는 계절의 감촉을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 주면 좋겠다. 첫 시간이 지나고 햇살이 제법 두꺼워졌다 싶어 1, 2학년 10명의 아이와 은행나무 밑으로 간다. 너무 많이 떨어졌어요. 아이들은 마치 눈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손으로 은행잎 무더기를 만든다. 성에 차지 않은 녀석들은 웃옷을 벗어 은행잎들을 담아서 모은다. 이제 은행잎을 뒤집어쓰고 뒹굴고 하늘 높이 뿌린다. 발돋움하여 뛸 때마다 예쁜 배꼽들이 보일락 말락 한다. 공기는 차갑지만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혀있다. 십여 분 가까이 깔깔거리고 뒹구는 아이들을 보며 시골 학교의 청정한 자연이 주는 혜택에 고마움을 느낀다. 노랗게 물든 아이들의 마음이 파란 하늘에 메아리친다. 땀이 식으면 감기 들까 싶어 서둘러 교실로 가자고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만 더 놀아요 떼를 쓴다. 도시의 아이들이 느낄 수 없는 계절의 마주함을 시골 아이들은 행복해하고 있다.

 

 

겨우 달래어 교실에 들어와 달력을 넘긴다. 올해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계절은 겨울 속으로 계속 진행한다. 마지막 달력을 넘기다 물끄러미 바라본 12월은 꽉 찬 시간의 마디 속에 일 년 치의 아쉬움이 몰려온다. 귓전에는 조금 전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이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꼭꼭 찍어둔 세월의 발자국이 뒷걸음질 치며 때 없이 웅성거린다. 하는 일이 아이들과 같이 웃고, 어르고, 야단치고, 보듬는 만큼 3월을 시작으로 봄, 여름, 가을을 거쳐 겨울이 깊어지니 아쉬움이 많이 물든다. 후회 없이 걸어왔잖아하며 애써 위안하지만, 여전히 가슴속엔 달려온 숨 가쁜 사연들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지금 서 있는 곳이 진부한 몸짓 남루한 뒷모습이라 해도 모두가 나의 노래다. 잘한 일도, 후회되는 일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최선이었다 포장하며 아픈 후회의 상처를 무딜게 보듬지 말자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12월은 1년의 종착역이라 한다. 하지만 시작과 끝은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다. 지나간 시간에 발목 잡혀 1년이라는 상자에 소담스럽게 담지 못하는 회한의 마음은 차가울 뿐이다. 그래도 회한은 가질 수 있어도 미련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교실 창문 너머 올려 본 하늘에 비행운이 직선을 긋는다.

 

정오가 되자 기온이 오른다. 아이들은 다시 은행나무 아래 낙엽을 모으고 그네에 태우며 걱정 없는 시간을 보낸다. 노랗게 물든 저 모습도 이제 일 년이 지나야 맞이할 수 있다. 결과에 치우치며 생각할 틈도 여유를 간직할 틈도 없이 달려온 우리의 한 해에 아쉬움과 위로를 물들여 본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세상 그곳 내 삶의 무늬는 어떤 결을 가졌을까? 겨울을 맞아 나목으로 서는 은행나무를 보며 버림으로 새로움을 준비할 수 있다는 반성문을 쓴다. 아이들의 웃음이 12월에 기대어 일기장에 노랗게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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