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5.11.05 (수)

  • 맑음동두천 17.2℃
  • 구름조금강릉 15.6℃
  • 맑음서울 18.5℃
  • 구름조금대전 18.0℃
  • 맑음대구 18.8℃
  • 구름많음울산 17.8℃
  • 맑음광주 19.8℃
  • 구름조금부산 20.7℃
  • 구름조금고창 19.9℃
  • 맑음제주 21.0℃
  • 맑음강화 16.6℃
  • 맑음보은 17.4℃
  • 맑음금산 17.9℃
  • 구름조금강진군 20.9℃
  • 맑음경주시 19.9℃
  • 맑음거제 19.4℃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라이프

[손지현의 낭만갤러리] 듣기, 기다림의 공명

 

핸리 오사와 태너의 <The Banjo Lesson> 

핸리 오사와 태너(1859~1937)의 1893년 작품 <The Banjo Lesson(밴조 수업)>은 흑인 가족의 다정한 모습을 묘사한 장르화이다. 조용한 실내에 퍼지는 빛과 음악이 따뜻한 느낌을 주는 시간을 담고 있다.
 

목사인 아버지와 노예였던 어머니의 가정환경으로 핸리 오사와 태너(Hanry Osawa Tanner, 1859~1937)는 흑인의 삶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세대 간 사랑을 담고 있어서 당시 흑인 이미지를 희화화하던 경향을 과감히 극복한 것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PFA)에서 토머스 이킨스에게 배웠고, 1891년 파리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장폴 로랑에게 사사 받은 후,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미국의 사실주의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그 외 그의 대표 작품은 프랑스 정부가 매입하여 오르세 미술관에서 소장하는 <라자로의 부활>과 백악관의 소장품 중 최초의 흑인 작가 작품으로 <샌드 듄즈, 애틀랜틱 시티>가 있다. 

 

흑인 음악과 깊게 연결된 밴조는 원래 카리브와 북미 식민지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만든 악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미국에서는 블랙페이스 등 흑인을 희화화하는 소품으로 소비되던 상징이 되기도 했다. 태너는 그 왜곡된 이미지를 가정의 평온한 배움의 장면으로 포착했다. 밴조의 악기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서 금방이라도 들릴 듯하다. 조롱의 표식이 아니라 기억과 전승의 매개가 되었다. 

 

세대를 넘어 함께하는 시간
작은 방 안, 램프의 둥근 빛이 아이의 뺨과 밴조의 둥근 울림통을 차례로 비춘다. 차가운 자연광과 따뜻한 실내광이 이중으로 만나서, 역광 속에 두 사람이 있다. 어둠과 빛이 선을 나누듯 벽과 바닥을 갈라놓지만, 그 경계 한가운데에 노인과 아이가 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대신 현 위에서 만나고, 손등 위에서 겹친다. 화면은 음악을 가르치는 듯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의 템포를 그린다.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 주는 세대 간 사랑이다.


노인은 가르치기보다는 지지한다. 노인의 왼쪽 손은 밴조를 들어주고, 그 무게를 함께 하며, 아이의 서툰 손가락이 음을 더듬을 때, 기다려 주는 듯하다. 그 위에 얹힌 손은 올바른 지판을 명쾌히 지시하기보다 ‘여기 함께 있다’라는 감각을 전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의 명확성보다는 함께 함, 즉 음악을 공유하는 순간이다.

 

배움은 정답을 겨누는 직선이 아니라, 서로를 감싸안는 곡선이 된다. 화면의 삼각 구도인 아이의 얼굴, 악기의 둥근 몸통, 노인의 손은 세대가 만드는 안정의 구조를 닮았다. 아이는 이 구조 속에서 조심스럽게 음을 찾아가는 자유를 얻고, 노인은 그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 완성된 멜로디보다 먼저 완성되는 것은, 그러한 공유의 순간이다.

 

분리와 배제에서 회복의 시대로
<The Banjo Lesson>이 그려진 1893년 전후의 미국은 노예제가 폐지된 지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법과 관습의 이름으로 분리와 배제를 제도화하던 시기였다. 흑인의 투표권은 여전히 시행되지 않았고, 각종 폭력은 일상의 위협으로 남았다. 흑인의 이미지는 대중문화에서 종종 타인의 욕구에 맞춰 연출되고 소비되었다. 흑인은 엔터테이너로 비인간화되고, 대상화되었다. 그런 시대에 태너의 조용한 방은 작은 피난처처럼 보인다. 작지만 소중한 이들의 공간에서 두 사람은 자기 템포를 가질 권리를 회복한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세대의 사랑이 함께 하는 공간에서 이들은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태너의 작품에서 설득력 있는 그것은 빛과 함께하는 두 인물의 시선이다. 필라델피아에서 토머스 이킨스에게 배운 사실적 관찰과 파리에서 익힌 빛과 공기의 감각이 이 그림에서 재현된다. 방안에 퍼지는 얇게 쌓인 어두운 화면 위에, 램프의 밝기가 층층이 번진다. 벽에서 퍼지는 붓 터치는 조용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감각이 느껴진다. 그 위로 손의 곡선이 천천히 떠오른다. 이 빛의 안배는 기술의 과시나 인물의 묘사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정서이다. 태너는 그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목소리(미세한 차이, 눈앞의 숨, 손끝의 체온)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조용하지만, 조용한 만큼 깊이 있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평범함
미술사적 맥락에서 보면 <The Banjo Lesson>은 장르화(일상 장면)의 문법을 전복한 작품이다. 흑인의 일상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품격 있게 제시함으로써, 당대 통속적 이미지의 회로를 끊었다. 흑인 인물을 희화의 대상이 아닌 관계와 사유의 주체로 그린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노인의 손에서 손자의 손으로 건너가는 배움은 기술의 전달만이 아니다. 실패를 허용하고, 속도를 맞추고, 한 음을 찾을 때까지 함께 까닭을 묻지 않는 관계의 약속이다. 서로를 믿고 기다려 주는 관계의 모습이다. 화면의 가장 밝은 지점이 소년의 뺨과 악기의 둥근 면이라는 사실은 빛을 통한 의미이다.

 

한 사람의 미래와 그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에 빛이 동시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 둘을 이음새처럼 붙잡아 주는 것이 노인의 손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랑이란 ‘순간의 대단한 결심’이라기보다, ‘속도를 조절하며 찾아주려는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작은 연습들이 모여 자라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