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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모래섬에서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여의도 탄생기

 

‘월스트리트’는 오늘날 금융 중심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단순한 거리의 명칭을 넘어 전 세계 자본이 응집된 공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단어는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 비롯되었다. 세계 최대의 증권거래소와 금융기관이 모여있는 곳으로, 미국 경제를 넘어 글로벌 금융질서를 주도해 온 상징적 무대이다. 따라서 ‘월스트리트’라는 표현은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금융의 메카’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렇다면 한국에도 이와 같은 ‘월스트리트’가 있을까?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심장부로 불릴 수 있는 금융 중심지는 어디일까?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은 바로 ‘여의도’이다. 여의도는 국회의사당과 방송국이 위치한 정치·언론의 무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증권사·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는 금융 1번지라는 점에서 ‘한국의 월스트리트’라 불린다. 실제로 한국 자본시장의 흐름은 상당 부분 여의도의 빌딩 숲에서 결정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여의도가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단순히 지리적 요인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 배경에는 한국 경제 발전사와 맞물린 역사적 흐름이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한국판 월스트리트, 여의도의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보고, 앞으로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자.

 

장마철만 되면 범람하던 모래섬에서 공군비행장으로
오늘날 여의도는 고층 빌딩과 금융기관이 늘어선 서울의 핵심지이지만, 개발 이전의 여의도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개발 이전의 여의도는 한강 한가운데에 자리한 모래섬에 불과했는데, 홍수가 나면 섬의 경계가 모호하게 될 정도로 자주 잠기는 땅이었다. 


처음으로 이 일대에 관심을 둔 것은 1916년 3월, 일제강점기 때였다. 당시 간이 비행장이 필요했던 일제는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언덕 하나 없는 여의도에 주목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여의도를 비행장 건립에 적합한 평지로 보고 여의도 비행장을 건설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비행장이 여의도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 비행장은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1922년 4월 조선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이곳에서 시범 비행을 펼치며 조선인들의 자긍심과 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역사적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이곳에는 대한민국 공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항공부대’가 결성되면서 여의도는 한국 공군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는 ‘여의도 국제공항’으로 정식 개항하면서 민간 항공기능까지 맡게 되었다. 하지만 여름마다 반복되는 한강 홍수로 인해 공항 운영은 늘 어려웠다. 결국 1961년, 국제공항 기능은 김포공항으로 이전되었고, 1971년에는 공군기지가 성남 서울공항으로 완전히 옮겨가면서 여의도 비행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팽창으로 인한 대안, 여의도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은 한국 사회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던 시기였고, 서울 역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주거지와 업무지 확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사대문 안팎에 더 이상 주거지를 공급할 땅이 없다고 지적하며 서울시에 대규모 주택공급을 지시했다.

 

이 문제해결을 위해 서울시는 여의도에 주목했다. 여의도는 도심에서 멀지 않은 평지였기 때문에 활용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모래섬이었다는 점이었다. 서울시는 섬 둘레를 따라 제방을 쌓고 땅을 매립하는 방식을 택했다. 비만 오면 물에 잠기던 황량한 모래섬을 항상 물 위에 떠 있는 진짜 땅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밤섬을 폭파해서 만든 섬
여의도 개발을 위해 먼저 해야 할 것은 제방을 쌓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방 공사를 위해 필요한 대량의 모래와 자갈, 심지어 바위까지 확보하는 것은 그 당시 자원과 재원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먼 지방에서 이 자재들을 운반하게 되면 시간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서울시는 현지조달, 즉 인근 지역에서 필요한 골재를 조달하는 것이 최선인 상황이었다.

 

이때 물색 된 현지 골재 조달지가 바로 인근에 있던 ‘밤섬’이었다. 밤섬은 여의도보다 지형이 더 높고 견고했으며, 큰 돌덩어리들과 자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섬이었다. 서울시는 1968년 2월 밤섬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고, 여기서 나온 돌과 자갈로 여의도 주변에 제방을 쌓았다. 

 

서울은 싸우면서 건설한다. 110일간의 미션
여의도 제방 공사를 시작했던 1968년 당시의 서울시장은 김현옥 시장이었다 그의 별명은 불도저 시장. 그만큼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행정을 펼치는 시장이었다. 여의도 제방 공사 역시 그가 추진한 대규모 개발 공사였다. 통상 2년 이상 걸릴 공사였지만, 여름 장마가 시작하기 전에 끝내야 했기 때문에 공기를 최대한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 개발 자원과 기술은 거의 전무했고, 인력과 장비 모두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1억 원 상당의 트럭 50대를 긴급히 구해 오기도 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사는 연 5만 8,400여 대의 중장비와 52만 명의 인력이 8시간씩 3개조로 24시간 내내 동원되었으며, 밤낮없이 작업이 이어졌다.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반포호텔이었는데, 그 건물 높이만큼의 모래 언덕이 여의도 전역에 440여 개나 존재했다고 한다. 놀라운 점은 이 모래 언덕들을 모두 사람이 지게로 날랐다는 것이다. 공사가 진행되던 시기에는 마포대교가 없었고, 임시 다리 정도만 있었는데 그 다리를 트럭이 지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래나 자갈 등을 섬 인근까지 트럭으로 운반하고, 섬까지는 모두 사람이 지게로 지고 나른 것이다.

 

이런 힘든 환경 속에서 인력을 총동원한 지 110일 만에, 1968년 6월 총길이 7.6km의 여의도 윤중제1는 완성되었다. 이 윤중제 덕에 여의도는 이제 한강 변의 저지대 침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안전한 택지로 변모하여 본격적인 도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여의도가 ‘한국의 월스트리트’가 된 까닭
여의도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는 넥타이를 맨 증권맨과 ‘대한민국 최대의 증권가’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의도가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불리게 되었을까?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한국증권거래소의 이전이었다. 원래 명동에 자리하던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옮겨온다는 소식이 1974년부터 전해졌고, 1978년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이 여의도에 들어오면서 관련 금융기관과 증권사들도 속속 여의도로 모여든 것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증권거래 대부분이 수기로 이루어져 처리 속도와 효율성이 낮았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전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실시간 거래가 가능해졌는데, 이 시스템이 원활히 작동하려면 증권사·거래소·금융당국·은행 등 금융시장 핵심 기관들이 한곳에 모여있어야 했다. 그 최적의 장소가 바로 여의도였다. 물론 증권사들의 이전은 순탄치 않았다.

 

여의도는 모래땅에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접근성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받기도 했고, 풍수지리적 인식에서도 여의도를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경제 호황과 함께 업무 효율성 제고가 절실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점차 증권사들이 여의도로 이전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여의도 증권가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법원도 여의도에 세워질 뻔했다?
여의도의 가장 상징성 있는 건물을 떠올려보자면, 역시나 ‘국회의사당’이다. 여의도 개발계획 수립 당시 사대문 안에 있던 국회의사당을 옮겨오는 계획이 확정되면서 여의도 개발은 박차를 가하게 된다. 하지만 여의도 개발 초기에는 국회뿐 아니라 주요 권력기관과 외국 대사관까지 이전해 정치·행정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다. 서울시청·대법원·서울고등법원·대검찰청·서울고등검찰청 등 핵심 공공기관을 비롯해 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 주요국 대사관을 함께 옮겨 대규모 행정·법조타운을 조성하려 했다.

 

이는 사대문 안에 자리한 기존 주요 청사 및 대사관 부지를 재개발하려는 목적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법조인들을 비롯한 권력기관 관계자들은 “왜 우리가 신도시 같은 여의도로 가야 하느냐”라며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대사관 역시 이전에 부정적이었고, 결국 대규모 이전 계획은 무산되었다.

 

서쪽은 국회의사당, 동쪽은 시범아파트
서여의도에는 계획대로 국회의사당이 들어왔다. 일찌감치 여의도 이전을 확정한 국회사무처는 의사당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주변에 건물을 세우는 기업에 의사당보다 낮은 층고를 요구했다. 그 결과 여의도는 공원을 경계로 동쪽은 고층 아파트와 오피스가 즐비하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들이 배치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독특한 도시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는 정치권력이 도시 공간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동여의도의 행정·법조단지 계획은 무산되면서 재원확보를 위해 이 땅을 아파트 부지로 팔게 된다. 이때 들어온 아파트가 바로 여의도의 ‘시범아파트’이다. 시범아파트는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 주거 시설이었다. 연탄 대신 중앙난방식 보일러가 설치되었고, 건물 높이는 무려 12층으로 당시 한국에서 지어진 아파트 가운데 가장 높았다.

 

특히 정부청사나 대형 백화점에나 있던 엘리베이터를 아파트에 도입하였는데, 시범아파트가 주택 단지로서는 두 번째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말 그대로 시범을 보일만한 아파트였다. 이러한 혁신적 시설 덕분에 시범아파트는 곧 여의도의 상징적인 주거지로 자리 잡았고, 그 뒤를 이어 삼익·대교·한양 등 민간 아파트 단지들이 연이어 건설되었다.

 

여의도 부동산의 특징과 미래
여의도 부동산의 가장 큰 장점은 단연 ‘입지 가치’이다. 여의도 자체가 서울 3대 업무지구 중 하나로 꼽히며, 광화문과 강남 역시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 업무와 생활의 편리함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또한 한강 변에 자리하고 있어 쾌적한 자연환경을 제공하고, IFC몰과 더현대 서울 같은 대형 생활편의시설은 일상에 풍요로움을 더한다. 이러한 입지적 장점들 덕분에 여의도는 오랫동안 전통적인 부촌으로 인정받아 왔다.


그러다 보니 단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크지 않다. 아파트의 연식이 오래되었다는 점과 높은 집값으로 인해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뿐. 현재 여의도 아파트들의 시세는 서울에서도 최상급에 속한다. 평당 1억도 훌쩍 넘는 가격인데, 평당 1억 이상의 가격을 유지하는 곳은 서울 내에서도 강남·서초·잠실·성수·용산 정도가 전부다. 즉 대한민국에서 가장 상급지로 손꼽히는 곳들이다. 


여의도의 미래는 재건축과 도시 재편에 달려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후 단지들이 차례로 재건축에 들어가게 되면,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는 10년 후, 한강 변을 배경으로 다시 태어난 여의도의 웅장한 도시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홍콩의 마천루 못지않은 아시아의 금융허브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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