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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현의 낭만갤러리] 함께 들어가 보는 한겨울 서사 피터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1525/30경~1569)의 1565년 작품 <눈 속의 사냥꾼(Hunters in the Snow)>은 시간을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거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동체의 풍경 속에서 삶의 일면이 잔잔히 느껴진다.

 

피터르 브뤼헐은 16세기 네덜란드 장르화1의 선구자로, 풍경화적 요소가 있는 화면에 농민의 삶을 담았다. 그는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작품을 남겼는데, 농업·사냥·음식·축제·놀이 등 마을의 절기 의식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삶과 일상을 섬세하게 담아내었다. 그의 회화는 기존에 유행하던 종교적 서사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관심을 돌려 삶과 자연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후기에서 바로크 초기 사이의 전환기 회화의 중요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브뤼헐이 활동하던 시기는 종교개혁의 격변기를 지나며 유럽 미술의 중심 주제가 신화와 종교에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일상으로 서서히 확장되던 때였다. 북유럽 미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과 문화의 재발견으로 꽃을 피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달리, 종교개혁의 정신에 영감을 받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절정기가 저물 무렵, 북유럽에서는 판화·풍속화·풍경화의 독자적 흐름이 생겨났다. 플랑드르 지역은 현재의 벨기에이며, 이 지역은 어려웠던 민중의 삶에 관한 관심과 아울러 도덕적 풍자를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하던 회화가 시작됐다. 


예컨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와 같은 미술가는 종교적 상징을 담은 <쾌락의 정원>에서 교훈과 기괴한 상상을 결합한 작품을 보여주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브뤼헐은 자신만의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로 발전시켰다. 브뤼헐의 작품에서는 농민·장인·사냥꾼 등 마을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등장하지만, 그들은 영웅이나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이웃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히 대자연의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시간과 감성을 품은 공간이 된다. 이처럼 브뤼헐의 겨울 풍경화는 우리를 그 한겨울의 일상으로 들어가게 할 만큼 현실적이면서도 서정적이다.

 

파노라마적 공간에 펼쳐진 한겨울 풍경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은 다층적 시점으로 공간을 구성한 뛰어난 작품이다. 그는 화면 속 공간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대각선 구도 원근법(diagonal perspective)과 공기 원근법(atmospheric perspective)을 활용하여, 멀어져 가는 풍경을 조용히 따라가도록 관람자의 시선을 안내한다. 전경에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냥꾼 무리, 중경에는 마을과 언덕 아래 얼어붙은 연못이 펼쳐지며, 후경에는 눈 덮인 산맥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이러한 구도는 전경에서 중경으로 점차 사냥꾼 무리의 움직임이 사라지고, 눈 덮인 산맥으로 연결되게 한다. 겨울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걸어가는 듯 하나의 서사가 느껴진다. 근대 영화의 연속 장면(sequence) 같은 연출에 선구적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또한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방식의 서사가 느껴지는데, 이는 작품 전체에서 균형과 불균형이 교차하며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비록 얼어붙은 한겨울 풍경 속에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있다. 자연 앞에서 인간 존재가 작은 듯해도, 인간은 생존을 지속하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이중적 시점이 교차하는 한겨울 속에 어딘가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왼쪽 전경의 사냥꾼 무리에서 시작되어, 깊은 눈길과 그 너머의 언덕, 얼어붙은 연못, 마을과 산맥으로 이어지는 구도를 따라 우리의 시선을 안내한다. 사선으로 구성된 화면은 시각적 움직임을 유도하고, 차분한 흑록색·갈색·백색의 제한된 색채는 겨울의 침묵을 강조한다. 사냥꾼들은 피로에 지쳐 고개를 떨군 채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으며, 뒤따르는 개들은 주인을 따르듯 나란히 걷는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생명이 나란히 겨울 길을 걷는 이러한 모습은 유대감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하늘에는 흐릿한 회색과 녹청색 빛이 겹쳐 겨울 특유의 낮고 흐린 하늘빛을 보여준다. 멀리 보이는 설산들은 고요하면서도 웅장한 분위기다. 화면 전체에 배치된 인물·건축물·나무가 리듬감 있게 반복되고 변화하며 조형적 통일감을 형성한다. 이러한 구성은 감상자에게 풍경을 함께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마치 동네에 함께 들어가는 몰입감을 준다.

 

인간 존재의 서사
<눈 속의 사냥꾼>은 브뤼헐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섯 폭으로 제작한 연작(일명 ‘계절 6부작’) 중 겨울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패널에 유채로 그려진 이 1565년 작 회화는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금까지도 가장 완성도 높은 계절 풍경화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브뤼헐은 이 작품에서 당시 플랑드르 지역 농촌 사람들의 겨울나기를 현실감 있게 담아내면서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섬세한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냥꾼들의 빈손과 거의 다 타버려 꺼져가는 불, 바람에 삐걱거리며 걸린 기울어진 간판, 그리고 얼음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눈에 띈다. 풍경 속에는 이렇듯 균형과 불균형, 수확과 결핍이 함께 있기에, 한겨울 공동체 삶의 현실이 느껴진다. 브뤼헐의 한겨울은 낭만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추위와 허기를 이겨내며 삶을 이어가는 인간 존재의 서사이다. 결과만을 중시하지 않고 삶의 과정을 담담히 응시하는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한 해의 마감과 시작에서 내려다보는 우리의 발걸음 
이 동화 같은 고요한 겨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걸어온 한 해의 발자취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매일 학생·가족·동료·이웃과 함께 겨울로 가는 길을 걸어왔다. 그 여정 속에는 기쁜 날도, 힘든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설렘과 보람으로, 어떤 날은 힘듦과 걱정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결국 한해의 여정을 잘 걸어온 셈이다. 그렇게 시간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지금, 한 해의 끝자락 문턱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다. 소중한 사람들과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함께 걸어왔는가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사냥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브뤼헐 작품 속 사냥꾼들의 걸음을 보라.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뒷모습은 조용하지만 흔들림이 없고, 비록 빈손인 듯 보이나, 그 빈손은 실패보다는 무사한 귀환을 뜻하는 것 같다. 사냥꾼들 주변의 개와 사람들, 얼음판 위의 아이들까지, 작품 속 여러 존재의 모습은 혹독한 계절 속에서도 공동체, 즉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 역시 때로는 무엇인가를 이룬 듯, 그렇지 않은 듯하지만, 긴 시간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쌓은 우리의 경험과 추억은 눈처럼 조용히 쌓인다.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마음
비록 이 작품의 배경은 브뤼헐이 의도한 1월의 풍경이지만, 한 해의 끝자락인 지금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준다. 한 해를 보내며 우리는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 사이에 서 있다. 브뤼헐의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고요한 전환기다. 눈 속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웃으며 놀고, 불가에서 사람들은 대화하며 온기를 나눌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한 해 동안 거둔 무엇인가보다는, 함께 걷고 겪어온 과정 자체가 소중한 시간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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