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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래빗의 부린이 탈출 가이드] 한국의 대표적인 부촌은 어떻게 탄생했나?

 

우리나라에서 ‘부촌’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어디일까? 사람마다 떠올리는 지역은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용산의 동부이촌동, 서초의 반포·잠원지구, 강남구 압구정동을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 지역들이 처음부터 부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부이촌동은 군사시설과 철도 창고가 자리하던 변두리였고, 반포·잠원 일대는 한강의 모래톱과 습지가 넓게 펼쳐진 황량한 지역이었다. 압구정동 역시 배밭과 농경지가 이어지던 서울 외곽의 조용한 마을에 불과했다. 지금의 부촌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도시 확장과 경제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두리였던 지역들은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최상급 주거지로 도약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에는 단순한 도시 확장 이상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국가의 개발 전략, 대규모 공유수면1 매립사업, 건설사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한강이라는 자연적 자원이 지닌 잠재적 가치가 서로 맞물리며 새로운 주거 축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기업 건설사에는 사업권과 용지 제공 등 다양한 형태의 특혜가 돌아갔고, 이는 곧 해당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부촌의 탄생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결과라기보다, 국가와 기업이 상호 이익을 공유한 개발 방향 속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들의 탄생 과정과 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도시 개발의 이면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조건과 흐름이 한 지역을 부촌으로 만들어내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부촌이 앞으로도 높은 프리미엄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단서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없던 땅을 만들어내다 _ 공유수면 매립사업
1960~70년대 한국 사회는 급격한 도시 팽창을 겪고 있었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수도권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서울의 주택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정부가 선택한 해법이 바로 ‘공유수면 매립사업’이었다. 서울시 입장에서는 한강에 제방 공사를 하면 홍수 예방뿐만 아니라 둑 위에 도로2를 만들어 교통 인프라도 확충할 수 있있고, 둑 안쪽에는 새로운 땅이 생겨나니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전략이었다. 거기다 그 땅을 매각하면 도시 개발을 할 수 있는 재원까지 마련되니 일석사조의 효과였다. 

 

건설사의 특혜 논란과 아파트 공화국의 시작
공유수면 매립사업은 본래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고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강과 바다를 매립해 도시 공간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얻은 매각 자금을 다시 다른 개발사업에 투입해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매립지에서 나온 택지 판매 수익은 여러 기반 시설 확충의 재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막대한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던 만큼, 편법과 특혜가 뒤섞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당시 이 사업에 참여했던 건설사들은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라고 표현했다. 공사가 대개 토목 비수기인 겨울철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평소 활용되지 않던 장비와 인력을 그대로 투입할 수 있었고,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모래를 채워 택지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공정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토지 중 국가 귀속 토지 외 잔여 매립지는 건설사가 소유권을 가져갔다. 건설사는 이 땅을 국영기업이나 관공서에 매도하기도 했고, 건설사가 직접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기도 했다. 어떤 방법을 하든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고, 수익은 확실한 구조였다.

 

국내 대형 건설사들은 엄청난 이익을 거뒀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기업은 비대해졌으며, 마침내 그룹으로 성장하고 재벌이 된 것이다. 그들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던 사업지가 바로 오늘날 서울의 핵심 주거지로 꼽히는 이촌동·반포동·압구정동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대기업으로 성장한 건설사들은 한국 아파트 시장을 주도하며 전국적인 주거 패러다임을 만들어냈고, 대규모 아파트 공급을 통해 주거의 양과 질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국가 주도의 개발사업에서 일부 기업이 과도한 특혜를 받으며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던 어두운 단면도 존재한다.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이 같은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동부이촌동의 개발 _ 한강 유역 최초의 매립사업지가 부촌으로
현재 용산의 동부이촌동 지역은 원래 미 8군 골프장3 아래에 있던 거대한 강변 백사장이었다. 지금의 도시 모습을 떠올리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곳은 여름이면 서울 시민이 피서를 즐기던 모래사장이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와 썰매를 타는 놀이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강 범람이 잦아 비만 오면 침수되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고, 제방 아래쪽에는 무허가 판잣집 약 2,400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방 공사에서도 배제되어 수차례 홍수 피해를 봤고, 1925년 대홍수 때는 마을의 절반 이상이 쓸려 내려가는 참사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차별과 방치는 전쟁 이후에도 이어져, 6.25 전쟁 직후 서부이촌동에는 미 8군 쓰레기 처리장이 설치되고, 분뇨 처리 능력이 부족한 서울은 이촌 일대 곳곳에 분뇨를 버리기도 했다. 

 

서울시는 침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도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1968년부터 동부이촌동 앞 모래사장을 메우기 시작했다. 공사는 단 7개월 만에 완료되었으며, 1969년 6월 한강에서 퍼 올린 토사로 매립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매립지에 학교·기관·신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이촌1동이 오늘날 동부이촌동이 되었고, 공영주택과 판잣집이 공존한 이촌2동이 서부이촌동이 되었다. 동부이촌동에 가장 먼저 들어선 건물은 공무원 아파트였지만, 이 지역을 진정한 고급 주거지로 탈바꿈시킨 결정적 계기는 1968년 착공된 ‘한강맨션’ 아파트였다. 

 

대한주택공사 장동운 총재가 일본의 ‘맨션’과 ‘하이츠’를 모델로 고급 중산층 아파트를 도입하겠다는 구상 아래 지어진 이 단지는 총 660가구 규모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단지였다. 한강맨션은 한국 최초로 견본주택을 선보였고, ‘근린주구론’4을 적용해 상가·학교·생활시설을 함께 배치하는 도시계획적 실험도 진행했다. 상가 아케이드가 1층에 배치되어 생활 편의성을 높였고, 지금도 그 형태가 동부이촌동 길목에서 오래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한강맨션 분양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정치인·연예인·기업인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부촌이라면 이촌동’이라는 말이 돌았으며,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반포의 개발 _ 최대 규모의 한강 변신 프로젝트
오늘날 서울에서 부촌을 이야기할 때 서초구의 반포는 늘 중심에 놓인다. 초고가 재건축, 학군, 한강 조망 등 모든 요소가 한데 모인 상징적 공간이지만, 처음부터 이곳이 비싼 땅은 아니었다. 지금의 반포본동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버드나무와 갈대, 모래밭과 채소밭이 뒤섞인 상습 침수지대였고, ‘반포’라는 이름조차 단지 나루터를 의미하던 시대였다. 이 일대는 그저 영등포의 동쪽을 뜻하는 ‘영동’이라 불렸다.

 

반포의 운명은 1970년대 초,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주택난 해소와 강남 개발의 교두보 역할을 맡기 위해 정부와 대한주택공사(주공)는 이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 계획을 마련했다. 국내 굴지의 건설기업인 현대건설·대림건설·삼부토건을 중심으로 반포지구 매립 면허를 받았고, 1972년 7월, 공사는 마무리되었다. 1970~1972년 한강 매립공사와 동시에 반포주공 건설은 시작되었고, 1971년 8월 착공에서 1974년 12월 완공까지 불과 3년여 만에 총 3,590가구가 들어섰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였으며, 지금도 단일 단지 면적(56만㎡) 기준으로 서울 최대 규모였다. 한강맨션(1970)·여의도시범아파트(1971)와 함께 ‘중산층 아파트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포주공은 이전 아파트들이 10~20평형대에 머물던 것과 달리 22평형부터 32평형·42평형까지 다양한 평면을 도입했다. 특히 32평형 한 가구가 위아래 두 층을 사용하는 64평형 복층 구조는 당시 한국 아파트 시장에서 최초의 시도였다. 일부 평형에는 ‘식모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이는 당시 계층 구조와 주거 문화를 그대로 반영했다. 그러나 복층형은 호화성 논란이 일자 계획된 6개 동 중 2개 동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단층으로 변경했다. 덕분에 반포주공 단지에는 지금까지도 ‘없는 동 번호’가 존재하는 독특한 흔적이 남기도 하였다.

 

평균 분양가는 395만~730만 원으로 당시 노동자 가구 평균 월 소득 4만 4천 원에 비하면 중산층 이상만 접근 가능한 가격이었다. 군인과 공공기관 종사자들, 서울대·KDI 교수 등이 사택으로 크게 유입되며 단지는 빠르게 중산층 주거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압구정의 개발 _ 현대가 만든 우리나라 최고의 부촌, 그 빛과 그림자
같은 시기, 한강에서는 또 하나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압구정이다. 매립 이전의 압구정 일대 역시 한강 변을 따라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곳곳에는 배나무 과수원이 자리해 농경지로 활용되던 공간이었다. 사람이 상주하는 주거지는 거의 없었고, 그저 강변과 농경지가 이어지는 여유로운 농촌이었다. 이런 농촌 지역이 개발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공사 대금 일부를 현금 대신 한강 공유수면으로 받으면서부터였다.

 

현대건설은 처음에 압구정 일대의 공유수면을 ‘콘크리트 제품 공장부지 조성 및 강변도로 건설’을 명목으로 매립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실시계획인가 단계에서 매립 목적은 조용히 ‘택지 조성’으로 변경되었다. 현대는 매립권 확보 후 분양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용도 변경을 신청했고, 정부 역시 급격한 도시 팽창과 주택 수요 증가 속에서 택지 확보가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승인한 것이다. 그 결과 산업시설용지로 계획되었던 매립지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개발 방향이 전환되었다.

 

현대건설은 매립 과정에서 성수대교와 동호대교 사이에 있던 작은 섬 ‘저자도’의 흙을 대량으로 퍼내 매립을 진행했다. 저자도는 결국 수몰됐고, 이렇게 조성된 인공 대지 위에 훗날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실 정주영 회장은 처음에는 아파트 건설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당시 부장이던 이명박이 강력히 주장해 사업은 추진되었다. 정주영의 차남 정몽구가 한국도시개발 대표로 사업 총책을 맡았고, 현대건설은 압구정에 중대형 평형 중심의 고급 민영아파트 1,512가구를 짓는 계획을 세웠다. 정부는 허가 조건으로 이 중 952가구를 현대의 무주택 사원에게 우선 공급하고, 나머지 560가구만 일반 분양하도록 요구했다. 

 

아파트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에는 아파트 투기 광풍이 불었고, 압구정 분양권에는 아파트 한 채 값에 가까운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했다. 고위 공직자와 군 장성, 국회의원·법조인·기업인·언론인 등 각종 권력층에서 분양 청탁이 줄을 이었다. 결국 사원에게 돌아가야 할 952가구 중 실제로 사원에게 분배된 물량은 291가구뿐이었다. 600가구 이상이 권력층 인사 및 현대 임직원 친인척과 지인들에게 돌아가며 심각한 특혜 문제가 발생했다. 

 

1977년 11월, 청와대에 특혜 의혹 투서가 접수되며 사건은 본격적으로 터졌다.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결과는 매우 미흡했다. 수백 명의 특혜 분양자 중 대부분은 처벌받지 않았고, 고위 공직자 56명은 단순 면직 등 경미한 조치에 그쳤으며, 정몽구 사장은 「건축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벌금 500만 원 선고유예를 받았다. 청와대가 수사에 직접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고, 언론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라는 사설을 내며 검찰을 비판했다. 결국 이 초대형 특혜 의혹은 큰 처벌 없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특혜 분양 사건은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상징성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높은 사람들이 사는 곳’, ‘권력층이 선택한 아파트’라는 사회적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압구정 현대는 한국 고급 아파트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압구정은 처음부터 43평형·54평형·65평형·80평형 등 중대형 중심의 민영 아파트로 설계되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고급 주거 상품’이었다. 한강 조망과 강남의 중심 입지까지 더해지면서 압구정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입지로 지금까지 인정받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부촌, 그리고 미래의 부촌
동부이촌동·반포·압구정 등 세 지역은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부촌이자, 서울 부동산 시장의 축을 형성하는 상징적 공간들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시기와 방식으로 발전했지만, 그 형성 과정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한강을 끼고 형성된 강력한 입지 프리미엄을 바탕으로 국가와 건설사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계획적 개발을 통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으로서 상징성과 브랜드가치를 오랜 시간 쌓아왔고, 지금은 재건축을 통해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다.

 

그렇다면 이들 세 지역은 앞으로도 한국 최고 부촌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 지위는 흔들리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한강이라는 절대적 입지 자산은 다른 지역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희소성을 지니고 있고, 이곳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브랜드 자산 역시 학군과 교통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선택의 상징으로 군림하고 있다. 여기에 재건축이 본격화되면 이들 지역의 주거 품질은 한 단계 더 높아질 것이고, 이는 곧 부촌으로서의 위상을 한층 더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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