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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만든 교육정책- 제1화] 의무교육과 인적 자본 형성

 

2026년은 교육계에 있어 매우 특별한 해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수많은 학교와 대학들이 설립되었던 관계로, 올해로 개교 80주년을 맞이하는 교육기관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 80년 동안 한국 교육은 수많은 정책적 변화를 겪었으며, 이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본고에서는 교육 80년을 돌아보며 한국 사회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였다고 판단되는 중요 교육정책들을 시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교육 기적’의 단초가 된 1948년부터 1960년까지의 정책적 노력을 재조명한다.

 

초등의무교육의 완성: 국가 재건의 설계도
한국 교육 정책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결정적 출발점은 초등의무교육의 완성이다. 1948년 출범한 신생 정부는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초등의무교육의 실시를 명시하였으며, 1949년 「교육법」을 통해 ‘모든 국민은 6년의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아동의 친권자 또는 후견인은 초등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였다.


비록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정책이 한때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정부는 1954년 다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초등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다시 추진하였다.1 당시 급증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 건축, 교원 양성, 교육과정 개발 및 교과서 제작,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예산 충원 정책 등 국가적 역량을 총결집한 전방위적 계획이 수립되었다.

 

실제로 당시 국가 전체 예산의 10% 이상이 교육에 투자되었으며, 문교 예산의 75~81%가 의무교육에 충당되었다. 정부는 임시토지소득세환부금제도·교육세·「의무교육재정교부금법」 등을 제정하며 의무교육 완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59년에는 취학률 95.9%를 달성하며 계획보다 1년 앞당겨 의무교육을 완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취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더욱 놀랍다. 해방 직전인 1944년 기준, 전체 인구의 14%만이 교육을 접할 수 있었고 초등교육 졸업자는 12%, 중등은 1% 이하, 대졸자는 0.2%에 불과했다.3 UN을 포함한 국제기구가 노력하여 전 세계 아동의 90% 이상이 학교에 취학하게 된 시점이 2010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1950년대 한국의 선택은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차별화되는 결정적인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교원 양성 체계의 구축과 교육 기회의 확대
국제개발업무를 담당하는 해외전문가들은 한국이 초등교육보편화에 필요한 우수한 교사인력을 어떻게 빠른 시간에 양성했는지 궁금해한다. 의무교육 이행을 위해 정부는 대규모 교원 양성에 나섰다. 1949년 「교육법」에는 중학교 졸업자를 입학 대상으로 하는 수업연한 3년의 사범학교 설립 규정이 포함되었다.

 

사범학교는 1946년 6개교를 시작으로 꾸준히 증설되었으나, 학생 수 증가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이에 정부는 사범학교에 단기 강습과정이나 임시 초등교원양성소를 부설하고 각 도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을 양성하였다. 이러한 임시 기관들은 1958년 수급 사정이 완화됨에 따라 폐지되고 사범학교로 일원화되었으며, 1962년 2년제 대학(교육대학), 1981년 4년제 대학으로 전환되며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또한 주목할 점은 교원 자격 관리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여러 선진국과는 다르게 국가 차원의 통일된 교원자격제도를 일원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교사의 전문성과 교육의 질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보장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교원정책은 전국의 어느 학교에 가더라도 표준화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 학생 수는 1948년 240만 5천 명에서 1960년 36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비록 매년 수천 개의 교실을 신축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반에 70명 이상이 모여 2부제나 3부제 수업을 들어야 할 만큼 당시의 교육 현실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교육 환경의 질적 저하를 감수하더라도 모든 학생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보편적 원칙을 최우선으로 추진하였다. 동시에 정부는 이러한 과다한 학생 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국가가 실력을 보증하는 우수한 교원 인력을 현장에 지속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과다한 학생 수로 인한 열악한 교육 여건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초등의무교육의 성과: 인적 자본의 형성과 산업화의 기틀
이러한 초등의무교육 정책은 도시와 농어촌, 남아와 여아를 불문하고 보편적 교육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시민의식 함양과 함께 1960~70년대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특히 국어와 산수를 익힌 인적 자본이 1950년대 후반에 대거 형성되면서, 이들은 합리적 경제활동의 바탕이 되는 계산 능력을 습득하였다. 이는 잠재적 근로자들이 제조업 기반인 도시로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 1959년 의무교육 실현은 여성교육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당시 한국의 여아 취학률은 북미 지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높았다. 유교적 전통 아래 소외되었던 여성교육을 법제화함으로써 취학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이는 1960년대 한국의 대표 산업이었던 섬유산업 등에 우수한 여성 인력이 투입되어 농경사회에서 제조업 국가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학(私學)을 통한 중등 및 고등교육 기회확대
제1공화국 시절 초등의무교육과 함께 중등교육 기회의 확대 역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다만 초등교육과 달리 중등 이상의 교육 기회는 주로 사립학교를 통해 확대되었다.7 현재까지도 중학생의 20%, 고등학생의 50%, 대학생의 80% 이상이 사립 체제에서 교육받고 있는 현실은 공교육 책임 방기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8, 당시 정부 예산의 한계 속에서 내린 선택지 중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949년의 농지개혁이었다. 정부는 유상몰수·유상분배 원칙에 따라 지주제를 해체하고자 했으나, 특별한 예외 규정을 두었다. 즉 토지 소유자가 학교법인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을 운영할 계획이 있는 경우 해당 토지를 몰수 대상에서 제외해 준 것이다.

 

 이는 지주들이 토지를 유지하는 대신 사립학교를 설립하도록 유도하는 실질적인 인센티브가 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설립되어 교육 기회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 정책에 대해서는 단기간에 교육 기회를 확대하여 사회 발전을 앞당겼다는 긍정적 평가와 사립학교 부실 운영 및 교육 질 악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이러한 사학 태생의 독특성은 이후 사학 정책이 자율성보다는 책무성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정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교육 강조 및 해외 유학 파견 정책
제1공화국 정책 중 다른 나라와 대비되는 정책은 과학교육 정책이다. 개발도상국들이 최근 과학·수학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비교하여 한국은 국가 출범 시부터 과학교육을 강조하였으며,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문교부에 과학교육국을 설치하고 이를 교육과정에 반영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과학기술대학을 목표로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고, 서울대와 한양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여 우수한 인재를 유학 보냈다. 1959년에는 최초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국내의 낮은 고등교육 수준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에 대규모 유학생과 연수생을 파견하였다. 2만여 명에 달하는 학자와 대학원생·공무원들이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이들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이 자체적인 교육·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인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는 평가이다.

 

마치며
1948년부터 1960년까지의 초기 교육정책은 절망적이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국가정책의 중심에 두고 인재양성에 정부와 민간이 같이 노력한 역사였다. 이때 구축된 초등의무교육의 토대와 사학을 통한 기회 확대, 그리고 과학교육의 강조는 이후의 교육정책과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는 가장 강력한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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