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재건과 인적 자원 개발의 변곡점
196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개발도상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국가 재정은 늘 부족했다. 그러나 불과 20년 남짓한 시간 동안 한국은 중등교육을 사실상 보편화하고,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대규모로 양성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한국 교육의 성취는 흔히 대학 진학률이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로 설명된다. 하지만 그 토대는 1960~1970년대 국가가 추진한 일련의 교육정책 속에서 형성되었다.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평준화, 직업교육 강화, 산업체 부설학교와 방송통신학교의 도입, 그리고 지방 국립대학 중심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모두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 정책들은 한국 경제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남겼다. 1960~1978년 한국 교육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살펴본다.

‘무즙 파동’이 바꾼 교실 _ 중학교 입시 폐지와 평준화 정책
1959년 초등 의무교육의 완성은 대규모 초등학교 졸업생을 배출하며 중학교 진학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1960년대 우수한 중학교와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학생과 학부모 모두에게 극심한 부담을 안겼다. 이러한 과열 경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이른바 ‘물엿 사건’ 또는 ‘무즙 파동’이었다. 중학교 공동 입시에서 엿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묻는 문항의 정답으로 출제 당국은 ‘디아스타제’를 제시했으나, 학부모들은 ‘무즙’ 역시 정답이 될 수 있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결국 서울시교육감은 무즙으로 실제 엿을 만들어 오면 정답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고, 학부모들이 무즙으로 엿을 고아 내 자녀의 합격을 요구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이 단순히 웃지 못할 일화로만 남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초등학생들이 감당해야 했던 입시 압박이 이미 비극적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과도한 입시 부담을 이기지 못한 초등학생들의 가출 사건 또한 정부가 더 이상 기존 입시 체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사회적 경고였다(중앙일보, 2025).
정부는 이러한 폐단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1969년 중학교 입시를 전격 폐지했다(교육부, 1998). 무시험 입학과 추첨에 의한 학교 배정 제도가 도입되었고, 기존 명문 중학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학부모의 지지를 바탕으로 제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정부의 개혁은 중학교 입시 폐지에 머무르지 않았다. 1974년에는 고등학교 입시에서도 단위 학교별 시험을 폐지하고, 추첨에 의한 학교 배정 방식을 도입하는 고교평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교육부, 1998). 이는 한국 교육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제도 개혁 가운데 하나였다.
중등교육 평준화의 성과와 사학 통제
평준화 정책은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를 구분하지 않고 적용되었다. 교육청은 사립학교에도 교원 인건비와 학교 운영비 등을 지원하는 대신, 학생들에게는 공립학교와 동일한 수준의 수업료만 부과하도록 했다(교육부, 1998). 사립학교를 공교육 체제 안으로 강하게 포섭하고 공공성을 부여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적 특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립학교의 자율성을 크게 제한했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평준화는 교육기회의 확대라는 공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지만, 학교 운영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논쟁적 성격을 지녔다. 그럼에도 평준화 정책은 명문 중·고등학교 진학을 둘러싼 과도한 경쟁을 완화하고, 중등교육 기회를 빠르게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0년대 말 40% 수준에 머물던 중등교육 취학률은 1980년대에 이르러 80% 수준으로 상승했고, 이후 1989년에는 90%에 도달하며 보편교육 단계에 진입했다.
이러한 단기간의 중등교육 확대는 국제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1980년 당시 OECD 평균을 웃도는 80% 이상의 취학률을, 국민소득 2,000달러 이하의 저소득국가 수준 경제 환경에서 달성해 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개발도상국의 농어촌 지역이나 여학생 중등 취학률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50%를 밑도는 국가가 여전히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중등교육 보편화 경험은 국제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가장 소외된 곳부터’ 도서벽지 지역 특별교육 지원
전체적인 교육의 양을 늘리는 과정에서 정부가 역점 추진한 또 다른 축은 소외 지역인 도서벽지(섬과 산간 오지)에 대한 특별지원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2026). 정부는 1963년 「도서벽지교육진흥법」을 제정하고, 이 지역 근무 교사들에게 순환보직제와 함께 농어촌 벽지 근무 시 인사가점·벽지수당·주택제공 등의 다양한 유인책(Incentive)을 제공했다(박영숙, 2004).
덕분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수한 교사들이 시골 학교로 유입될 수 있는 체계가 다져졌다. 아울러 교과서를 무상 공급하고 별도 예산을 배정해 농어촌 아동들의 실질적인 교육기회를 보장했다. 이러한 도농 간 격차 해소 노력은 오늘날 개발도상국 교육 개발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UNESCO-KEDI, 2014).
산업체 부설학교와 방송통신 중·고등학교의 혁신적 운영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으로 법제화되어 있었지만, 당시 중등교육은 아직 의무교육 단계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다자녀 가정에서 여아들의 중학교 진학 기회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많은 여성 청소년은 가정 경제를 돕거나 남자 형제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일찍 노동 현장에 들어갔다. 이들은 1960년대 섬유산업을 비롯한 수출 경제의 중요한 주역이기도 했다(World Bank, 1980; 김영화, 2002).
제도적 교육 확대 속에서도 여전히 소외되어 있던 여성 청소년들의 교육 열망은 현장에서 직접 표출되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합섬을 방문했을 때, 현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 요청을 계기로 정부는 산업체 안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산업체 부설학교는 야간이나 주말 등 근로자의 생활 조건에 맞춰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정부는 이에 필요한 제도와 재정 지원 체계를 마련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2026; 천세영, 2021). 당시 국무회의 등에서 부설학교 운영 상황이 점검되었다는 사실은 이 정책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컸음을 보여준다.
산업체 부설학교는 노동 현장의 절실한 요구를 정부가 제도적으로 수용한 사례였다. 또한 기업 지원 방식과 교육기회 확대가 결합된 모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오늘날 이 모델은 방글라데시 치타공 등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현지 여성들의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방식으로도 참고되고 있다. 이와 함께 1974년 시작된 방송통신 중·고등학교 정책 역시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일하는 청소년들은 주중에는 방송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고, 주말에는 지정된 공립학교에 출석해 대면 수업을 받았다. 국가는 이들에게 정규 중·고등학교 학력을 인정했다. 이는 노동 청소년들의 학업 의지를 제도권 안으로 포용하려 한 대안적 교육모델이었다.
중화학공업의 전사들을 키우다 _ 직업고등학교 체제 구축
1970년대 대한민국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대대적인 경제 체질 개선을 시도한다. 제철소·조선소·화학공장이 들어서면서 이를 움직일 거대한 숙련 기술 인력이 필요해졌고, 정부는 실업계(직업계) 고등학교에 파격적인 예산을 지원하였다. 학계에서는 1980년대까지 한국의 교육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고리 중 ‘중등교육’의 기여도가 가장 높았고, 이에는 직업계고 정책이 기여하였을 것으로 평가한다(김영화, 2001).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울산 조선소 건설과 함께 현대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한 사례는 산업현장과 직업교육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 직업교육의 특징은 직업교육이 국가교육과정 안에 상세히 포함되어 정규 학력 체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직업교육 트랙을 밟으면서도 ‘대학 진학의 길’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7년부터는 실업계고 출신들만 경쟁하여 동일 계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대입 특별전형’ 제도를 도입해, 우수 인재들이 실업계고로 대거 유입되도록 유도했다.
1963년에는 학교와 산업계를 묶는 「산학협력법」이 제정되어 현장 실습과 예산 지원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박동열, 2016). 당시 정부의 직업교육에 대한 관심은 예산 배분에서도 확인된다. 직업교육 기관에 투입된 정부 예산 비중이 고등교육 전체 예산 비중에 육박할 정도였고(Lee et al., 2018), 국제기능올림픽 등 국가적 장려 사업도 적극 추진되었다. 정부 예산뿐만 아니라 국제기구 차관 사업도 연계되어 직업고등학교의 기자재와 교육 여건 개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박동열, 2016).

지방 국립대 공과대학의 황금기 _ 국립대 공대 집중 육성
제3·4공화국 시기의 고등교육 정책은 ‘양적 팽창 억제’와 ‘지방 국립대학교 공과대학 특성화’라는 두 가지 특징을 보였다. 정부는 제1·2공화국 시절 사립 부문을 중심으로 대학이 난립하고 학사 운영의 부실이 나타났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정권 초기부터 대학 정원 감축과 정원 통제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정원 억제 정책이 순수한 인력 수급 판단만이 아니라, 고학력 실업자 증가와 학생운동 확산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정치적 목적과도 관련되어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행정적 통제에도 불구하고, 사회 지도층과 유력 사학 재단이 운영하는 대학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원을 늘려갔고, 실제 대학 정원은 계속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고등교육 수준의 고급 기술 인력 공급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정부는 지방 거점 국립대학교를 중심으로 지역 특화 산업과 연계된 공학계열 학과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백성준 외, 2003). 부산대학교의 기계공학, 전남대학교의 화학공학, 경북대학교의 전자공학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매일경제, 1976). 이들 분야는 국가 타겟형 육성 대상으로 지정되어 정원이 확대되고 실험 시설이 확충되었다. 반면 수도권 대학의 정원은 강하게 규제되었고, 인문사회계열 분야의 증원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자원 배분은 지방 국립대학의 공과대학으로 우수 인재가 집중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었다(동아일보, 1977). 서울로 진학하는 대신 지역 거점 국립대의 특성화 공과대학을 선택하는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국가연구중심대학 육성전략 _ 서울대학교와 KAIST
한편, 지방 거점 국립대학 육성 정책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고등교육 정책은 국가 차원의 연구중심대학 육성 전략이었다. 정부는 산업화 과정에서 필요한 기능인력뿐만 아니라 국가 연구개발과 과학기술 혁신을 이끌 고급 연구인력 양성 체계의 구축 역시 중요한 국가 과제로 인식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대학교의 관악캠퍼스 이전 및 통합 사업이다. 1960년대 당시 서울대학교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여러 단과대학이 분산되어 있어 교육·연구 협력과 대학 운영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정부는 서울대학교를 국가를 대표하는 종합 연구대학이자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대규모 통합캠퍼스 조성 계획을 추진하였고, 1970년대 중반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이전을 완료하였다(서울대학교, 2016).
이와 함께 정부는 산업화와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할 최고 수준의 연구인력 양성을 위해 1971년 한국과학원(KAIS, 현 KAIST)을 설립하였다. 당시 정부는 기존 대학 체계와 차별화된 연구중심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이를 둘러싸고 기존 고등교육 체계와의 역할 분담과 관할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았다. 결국 한국과학원은 일반 대학과는 다른 특수목적 연구·교육기관으로 설계되었으며, 문교부가 아닌 과학기술처 산하 기관으로 설립되었다(KAIST, 2021).
결과적으로 제3·4공화국 시기의 고등교육 정책은 지방 국립대학을 지역 산업 발전의 거점으로 육성하는 한편, 서울대학교를 국가 대표 종합 연구대학으로, KAIST를 국가 전략기술 혁신을 이끄는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는 다층적 인재 양성 체계를 구축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이후 대한민국이 제조업 중심의 산업국가를 넘어 과학기술 기반 국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고등교육 병목 현상과 전문대학체제의 정비
1970년대 한국 교육은 중등교육의 급속한 확대와 고등교육의 강력한 억제가 동시에 나타난 시기였다. 중등교육은 빠르게 보편화 단계에 접근했지만, 고등교육 기회는 국가의 정원 통제 아래 제한적으로만 확대되었다. 1980년 무렵 중등교육 취학률은 이미 80% 수준에 이르렀으나, 고등교육 취학률은 여전히 10% 수준에 머물렀다(김영화, 1993).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대학 입시 경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특히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 진학에 실패한 학생들이 다시 입시에 도전하는, 이른바 ‘재수생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정부는 결국 1978년 대학 정원을 점진적으로 연 12%씩 늘리는 고등교육 확대 계획을 수립했다(오제연, 2022).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수도권 대학은 주간 과정이 아닌 야간 과정 중심으로 제한적 증원만 허용되었고, 지방대학 우선 지원과 이공계열 우선 증원이라는 통제 원칙은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학 정원이 사립대와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을 일정 부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다만 1970년대의 이러한 규제 기조는 1980년대 시행된 졸업정원제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이후 한국 고등교육은 수도권·사립대·인문사회계열 중심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한편, 이 시기 고등교육 정책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단기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학의 지위가 명확히 법제화되었다는 점이다. 초급대학, 5년제 실업고등학교, 전공대학 등으로 분산되어 있던 제도들이 ‘전문대학’이라는 단일 학제 체제로 통합·정비되었고, 이때부터 국가 차원의 공식 전문대학 통계 관리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 고등교육 통계상 대학 재학생 수가 8만 명 이상 증가한 것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정부가 고등교육 인구 자체를 단기간에 대폭 확대한 결과라기보다는, 기존 학제 안팎에 흩어져 있던 직업교육·훈련 인구가 전문대학 체제 안으로 공식 편입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1978년부터 추진된 대학 정원의 점진적 확대 계획이 더해지면서 통계상 고등교육 인구 증가가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형 중등교육 모델의 역사적 의의와 빛과 그림자
결론적으로 제3·4공화국 시기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은 제한된 국가 재정과 급속한 산업화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교육기회의 확대와 인적자원 양성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던 국가 주도의 대규모 사회 프로젝트였다.
정부는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평준화를 통해 중등교육 기회를 대폭 확대했고, 도서벽지 지원 정책을 통해 지역 간 교육격차를 완화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직업고등학교를 중화학공업화 전략과 연계하여 육성함으로써 산업 현장에 필요한 기능인력을 체계적으로 공급하였다. 여기에 산업체 부설학교와 방송통신 중·고등학교를 도입하여 학업을 중단했거나 경제활동에 종사하던 청소년들에게도 교육기회를 제공하려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 안의 학생뿐 아니라 학교 밖 청소년까지 교육체제 안으로 포용하려 했던 비교적 선구적인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등교육 분야에서는 전반적인 양적 팽창을 억제하면서도 지역 거점 국립대학교와 공과대학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진하였다. 이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에 필요한 고급 기술인력을 육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동시에 지방대학과 지역산업을 연계하는 한국형 지역발전 모델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정책들의 결과로 한국은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중등교육 보편화에 성공했고, 산업화에 필요한 기능인력과 고급 기술인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경제성장과 사회 이동성 확대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한국 교육 발전의 토대를 형성한 역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이면에는 분명한 한계도 존재했다. 교육은 국가 경제개발 전략과 긴밀하게 결합되면서 인간의 전인적 성장과 교육의 자율적 가치보다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국가 주도의 강력한 통제 체제는 사립학교의 자율성과 학교 간 다양성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으며, 효율성과 획일성을 중시한 정책 기조는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적성과 개성을 폭넓게 수용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재정적 제약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 정부는 중등교육 확대와 산업인력 양성에 정책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에 학생 복지, 교육 취약계층 지원, 맞춤형 교육서비스와 같은 영역까지 충분히 투자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시 경쟁은 완화되었지만, 그 압력은 대학 입시로 이동하면서 입시 경쟁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험은 오늘날 많은 개발도상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교육기회 확대, 산업 인력 양성,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던 한국의 교육정책은 성공과 한계를 모두 지닌 발전국가형 교육모델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한국 교육의 기적은 단순히 학교 수를 늘린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가 교육을 통해 사회와 경제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거대한 실험의 역사이며, 그 성취와 한계를 함께 성찰해야 할 소중한 정책적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