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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구절초와 쑥부쟁이

늦가을이 저물어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동네 한 바퀴 오동마을 주변 논 밭두렁 따라 구절초가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듯한 풍경으로 어우러져 있다. 코스모스처럼 화려하지도 국화처럼 풍성하지도 않은 소박한 꽃 잔치다. 어릴 적 이맘때면 그저 들판이나 논밭 언덕에 핀 하얀 들국화라고 생각하며 지나친 꽃이다. 하지만 식물도감에 들국화라는 꽃은 없다. 들국화는 말 그대로 들에서 피는 국화란 뜻이다. 통상 우리가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은 구절초와 쑥부쟁이, 해국, 감국, 산국 등이 포함된다.

 

 

구절초의 이야기는 무엇을 품고 있을까? 구절초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모정이라는 깊은 마음과, 꿋꿋하게 가을 서리를 이겨내는 강인함 속에 숨겨진 순수한 약속이 숨겨져 있다. 어찌하든 간에 구절초의 가장 대표적인 꽃말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 즉 ‘모정(母情)’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구절초는 예로부터 여성들에게 특히 좋은 약초로 널리 알려져 왔다. 몸이 차가운 딸이나 며느리를 위해 어머니들은 가을이면 이 꽃을 말려 따뜻한 차를 끓여주시곤 했다. 그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향기와 함께 묵묵히 들판을 지키는 그 모습이, 늘 자식 뒤에서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의 모습과 똑 닮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값비싼 선물보다 소박한 구절초 꽃다발이나 따뜻한 구절초 차 한 잔이 더 깊고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

 

 

구절초(九節草)라는 이름에도 재미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는 음력 9월 9일, 즉 중양절 무렵에 채취한 것이 가장 약효가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홉 구(九) 자와 마디 절(節) 자가 이름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줄기에 아홉 개의 마디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홉이라는 숫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이 꽃은, 오랜 시간 변치 않는 굳은 약속과 인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가을의 맑고 높은 하늘 아래, 티 없이 하얗게 피어난 구절초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깨끗하게 정화하는 듯한 힘이 있다. 코스모스가 소녀의 풋풋함을 상징한다면, 구절초는 모든 것을 겪어낸 뒤의 맑고 성숙한 순수함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구절초는 순수와 고결함이라는 의미도 함께 품고 있다.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옛 선비들이 가을이면 이 꽃을 찾아 시를 읊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절초는 겉보기에는 가냘프고 청초해 보인다. 금방이라도 찬 서리에 스러질 것 처럼 보여 가련함이라는 꽃말도 있지만, 사실 구절초는 웬만한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매우 강한 생명력을 지닌 야생화이다. 가련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이 강인함이야말로 구절초가 가진 진짜 매력이다.

 

 

구절초는 화려한 미사여구는 없지만, 그 안에 어머니의 사랑, 굳건한 약속, 맑은 순수함, 그리고 외유내강의 강인함까지 품고 있는 아주 깊고 진실한 꽃이다. 그래서 이 꽃은 요란한 축하보다는, 조용하고 따뜻한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전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쑥부쟁이를 알아본다. 쑥부쟁이의 꽃말은 옛사랑, 순정, 무병장수이다. 꽃에 전해지는 전설과 더불어 어울리는 꽃말은 옛사랑 또는 순정이고, 한겨울에도 언덕배기에 한두 송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무병장수라는 꽃말이 어울릴 것 같다. 쑥부쟁이와 관련 함경도 지방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다.

 

옛날 어느 두메산골에 가난한 11남매를 둔 대장장이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고 대장간의 일도 많지 않아서 큰딸은 산과 들로 나가 나물을 뜯어 식구들의 생계를 간신히 이어갔다. 어느 날 나물을 뜯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숨겨 준다. 노루는 반드시 은혜를 갚겠노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멧돼지를 잡으려고 파놓은 구덩이에 총각이 빠져 있어 구해준다. 그 청년은 한양에 사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나중에 은혜를 갚겠다고 한다. 대장장이의 딸은 첫눈에 총각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기다려도 총각은 오지 않고 처녀는 상사병에 걸린다. 이제 간신히 동생들이 좋아하는 쑥을 캐러 다닐 뿐이다. 그래 동네 사람들은 이 딸은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대장장이)네 딸이라는 뜻의 쑥부쟁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전에 구해주었던 노루가 나타나 노란 구슬을 세 개를 주면서 구슬을 입에 물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큰딸은 첫 번째로 오래 병을 앓고 있었던 어머니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고, 두 번째 소원은 총각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나보니 총각은 이미 결혼했고, 자식들까지 있는 몸이었다. 마음씨 착한 큰딸은 마지막 소원으로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그 이를 보내주세요.’ 한다. 이후에도 큰딸은 예전처럼 들과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다녔지만, 마음속에는 늘 그 총각이 남아있다. 그리고 총각을 생각하다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그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둔다. 이듬해 가을 그 자리에는 노란 구슬을 담은 듯한 연한 보랏빛의 꽃이 탐스럽게 피어났는데 그 꽃이 쑥부쟁이꽃이다. 동네 사람들은 쑥부쟁이의 혼이 나물을 좋아하는 동생들을 위해서 피어났다고 하며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의 딸이라는 뜻의 “쑥부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절초든 쑥부쟁이든 모두 들국화의 일종이다. 잎이 쑥갓처럼 깊게 갈라져 있고 가을에 피면 구절초, 잎의 가장자리가 밋밋하거나 톱니 모양이며 가을에 피면 쑥부쟁이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 ‘무식한 놈’에서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라고 하였다. 시이불견(視而不見)이다. 보기를 하되 보지 못하는 자신을 빗대었다. 사실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감동을 모르면 삶의 재미는 덜한 것이다.

 

이 늦가을 어머니의 사랑을 간직한 구절초와 나물로 먹고 지천으로 널린 쑥부쟁이에 숨은 사연을 안다면 그 애절함을 느낄 것이다. 둘 다 척박한 바위와 땅에 뿌리를 박고도 굴하지 않는 기개가 부럽다.

 

구절초꽃을 간질이던 더넘바람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꽃처럼, 나무처럼, 물처럼 살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대가 없이 베풀고, 겸손하게 살라고. 깨끗이 비운 마음에 먼지가 앉을 때마다 들국화를 보면서 삶의 아포리즘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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