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산 인제대 백병원 병원학교
외래환자로 북적이는 월요일 아침 부산 인제대 백병원. 로비를 지나 ‘어린이병원학교’ 이정표를 따라 1층 복도를 걸어 들어가자 10평 남짓 아담한 교실에 김진주(부산혜송학교) 교사와 아이들이 있었다. 오전 초등수업을 받으러 등교(?)한 아이들은 대부분 커다란 마스크에 줄무늬 환복을 입은 소아암 환우들.
빡빡 민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재근(13·마산 광려초)이는 6학년 사회교과서를 펴고 ‘힘을 겨루며 성장한 세 나라’를 읽는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차례로…한강 지역을 차지하며…어휴, 머리 아파….” 그러면서도 책장을 쥔 손가락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노트북 마우스를 움직여 삼국의 영토변화 모습과 유물도 검색한다. 뇌종양으로 3학년 때부터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재근이는 지난달 9일 개교한 동아대 병원학교의 학생이 됐다.
‘나는 오늘 양을 지키다….’ 급성백혈병으로 오늘 다시 입원한 주혁(11·부산 효림초)이는 양치기 소년과 늑대를 읽고 보조교사와 함께 반성일기를 쓴다. 이곳서 공부하다 지지난주 퇴원했던 주혁이는 다시 건강이 나빠져 오늘 입원하게 됐는데 병실은 제쳐두고 교실로 직행했다.
김 교사는 일기를 다 쓴 주혁이에게 이번에는 ‘되고 싶은 인물 찾기’ 학습지와 신문을 줬다. 신문을 뒤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사진을 오려 붙인 주혁이. ‘대통령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공부, 선거연습, 다른 나라 조사…’ 잘도 둘러쓴다.
복잡한 역사를 읽던 재근이는 주혁이가 부러웠는지 “선생님, 나도 저거 노는 거 하고 싶은데…” 어리광이다.
맞은편에서는 백혈병을 앓는 주현·세현(12)이가 링거를 꽂고 휠체어에 앉은 채 수학문제와 씨름한다. 공배수·공약수에 대한 김 교사의 개념설명과 문제풀이를 눈여겨 본 아이들은 교과서 연습문제를 척척 풀어낸다. 추가로 받은 수준별 학습지 문제도 금세 해결한다. 올 1월 발병해 입원한 주현(창원 대방초)이는 5학년 2반에 배정됐지만 반 친구 대신 이곳 친구들과 먼저 만났다.
오후 1시. 4교시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빠져나간다. 그러더니 잠시 후 빠끔 문을 연 재근이가 대뜸 “뭐 숙제는 없어요?”하며 아쉬운 표정이다. 병실로 돌아가기 싫은 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주현이는 “전에는 지겹게 누워있거나 TV만 봤어요. 아파서 학교에 못가 속상했는데 이곳에서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게 돼 좋아요”하며 웃는다.
때도 없이 열이 나고 토가 나고 무균실에 격리되는 병이란 놈은 그런 아이들 마음을 몰라준다. 갑자기 열이 나 교과서를 덮고 올라간 재형이를 비롯해 오늘도 3명이 책상을 비웠다.
그래도 조금만 몸이 나으면 아이들은 교실로 못 내려와 안달이다. 아침 수업에 늦을세라 의사선생님의 회진이 끝나자마자 간호사 언니의 소매를 붙잡고 얼른 주사부터 놔달라고 떼를 쓸 정도다. “몸은 많이 힘들어요. 하지만 여기서 공부하는 게 좋아요. 지난번 특별활동 때 초코과자 만든 건 정말 재밌었어요”하는 재근이는 “저 이제 밥도 잘 먹어요” 자랑한다.
병원학교는 교과서를 공부하는 교실 그 이상의 의미다. 거기에선 삶의 희망을 읽는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보호자들 말이 병원학교가 생긴 후 아이들이 밥을 챙겨 먹기 시작했대요. 그리고 부모들도 종일 병상에 축 처진 아이를 바라보는 형벌에서 벗어나게 됐대요.” 오후 유치부 수업을 준비하던 김 교사가 귀띔한다.
병원학교 이순용(의대 석좌교수) 교장도 “감옥 같은 병원생활에 위축됐던 아이들이 병원학교로 인해 즐겁고 활기 있게 변했다”며 “그런 심리상태는 병의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부산에는 이런 병원학교가 부산대병원, 동아대병원에 또 있다. 여기 외에 서울대병원, 연세세브란스병원, 경상대병원, 부곡정신병원까지 전국에 7개의 병원학교가 있지만 교육청 지정 대안학교이자 파견학급으로서 정규, 보조교사가 파견되고 재정이 지원되는 곳은 부산뿐이다. 다른 곳들은 병원, 자원봉사자, 독지가의 힘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 만큼 부산 병원학교의 학사일정은 정규학교와 거의 같다. 월~금요일(주5일 수업)까지 매일 유치부 2교시, 초등부 4교시 수업이 연 185일 진행되며 여름, 겨울방학도 있다. 이 중 초등은 교과서 위주의 국어(연 185시간), 수학(185), 사회(108), 과학(77) 수업 외에 컴퓨터, 작문, 예능활동이 주가 되는 특별활동(25), 재량활동(75)으로 구성된다.
물론 수업방식은 보통 학교와 다르다. 같은 아이가 꾸준히 수업을 받는 것도 아닌데다 보통 3, 4복식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수업 참여 환아를 파악해 그날 수업을 재구성하는 것은 교사의 몫이다. 하루 평균 5~10명과 하는 수업도 그래서 어렵다.
김 교사는 “저, 고학년으로라도 나눠 수업을 할 수 있게 정규교사가 1명 더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병원학교 학생인 이상 이들의 출석과 수업은 모두 인정된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유급되거나 학습이 부족해 어렵게 되돌아간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부산시교육청 박희원 장학사는 “병마와 유급이라는 이중고를 겪는 아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고 삶의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며 “앞으로 정형외과 입원자나 신장질환자 등도 입학대상자에 포함시키고 중등과정도 개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용기를 잃지 말자. 희망을 갖자. 건강에 최선을 다하자’ 교실에 반듯이 걸린 병원학교의 교훈은 오히려 간절한 기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