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만한인, 임시정부 아닌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 지지
국민당보다 공산당이 만주동포 우호정책 실시했기 때문
중국공산당 ‘민족자치’ 원칙과 한인의 ‘혁명전통’ 결합
해방 후 ‘연변조선족자치주’ 탄생하게 하는 주요 계기만주와 한국 근·현대사 20세기 전반기 일제 강점기에 ‘만주’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다. 주로 19세기 후반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주민들은 재난에 따른 굶주림과 부패관리의 토색질을 피해 이 땅으로 건너갔고, 어떤 사람들은 진인(眞人)이나 정도령이 있는 ‘이상향’을 찾아 이곳을 찾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또 적지 않은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동기에서, 1930년대 이후에는 주로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로 이주되기도 했던 것이다.
만주는 1930년대 이후 일부 친일 한인들에게는 ‘별천지’일 수 있었으나,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이별과 한숨, 눈물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20세기 초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수많은 단체와 애국지사들이 비장한 각오로 일제와 결전을 벌였던 투쟁의 공간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들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곳을 빼놓고 한국현대사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특히 남한과 북한의 날카로운 대립이 계속되던 1960~70년대에 양 분단국가를 통치한 박정희와 김일성은 모두 만주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1940년대 전반기 박정희와 김일성은 일본군 장교와 항일빨치산이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었다. 이들의 만주에서의 경험은 이들이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정권을 잡은 뒤 국가운영과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지만, 북한을 영도했던 김일성이 이곳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오늘날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핵심요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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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교도려 1943년 초여름 소련 하바로프스크 부근 브야츠크촌에 있는 소련 적군 88여단 본부 앞에 서 기념촬영한 주요 간부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일성, 세 번째가 여단장 주보 중, 그 옆은 주보중의 부인 왕일지.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 ‘발굴자료로 쓴 한국현대사’, 중앙일보사, 1996, 108쪽) |
한국현대사를 좌우한 박정희는 물론 최규하·전두환 전 대통령 등도 만주지역과 깊은 연고가 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황군’ 장교로 친일부역했으나, 일제 패망 직후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에 가담하는 등 놀라운 변신을 보여 주었다. 최규하 역시 만주국 관리로 근무했으며, 전두환은 길림성 반석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李範奭), 군인·외교관과 정치인으로 크게 활약한 김홍일(金弘壹), 지청천(池靑天) 등이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분투하기도 했다.
또한 만주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계속된 중국 국공내전의 승패를 가름한 결정적 전장이 되었던 곳이다. 이 때문에 만주는 우리민족의 비극인 ‘6·25전쟁(한국전쟁)’의 발발과 확산, 지연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처럼 만주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격변의 요충지였다.
해방 전후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동향 독립운동은 ‘민족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이라고도 한다. 특히 한민족과 같이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민족이 전개한 독립운동은 그 성격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라 할 수 있다. 1860년대 이후 압록강·두만강 건너편의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한인)들이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곳은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해 주요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 이래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각종 학교들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많은 독립군 단체들이 결성되어 강력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등을 통해 빛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0년대 말까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과 중국공산당 계열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활동이 계속되면서 만주지역은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항일세력은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반에 거의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혁명당 계열은 일제가 패망한 뒤 중경(重慶)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한국광복군, 그리고 중국국민당 및 국민정부군 계열과 연계하여 다시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예를 들면 김학규(金學奎) 등은 해방 직후 남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계열의 한국독립당 동북당부와 ‘장연민주자위군(長延民主自衛軍)’으로 결집되었다. 이들은 1946·7년경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의 ‘만주계획’에 따라 한국과 미국 등의 반공·동북아 전략에 부응해 정치세력화 하는 동향을 보였다.
한편 이들과 달리 대다수의 재만한인들은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동북항일연군 계열이나 조선의용군·조선독립동맹 세력을 지지했다. 그것은 중국국민당보다 중국공산당이 훨씬 더 동포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 남만주 지역에서 투쟁하던 김일성 등의 잔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은 일제의 탄압에 쫓겨 1940년 12월 소련·만주국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도피했다. 1942년 7월 소련 극동군은 월경한 동북항일연군 제1·2로군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성하고, 다시 8월1일 ‘소련 적군 88특별저격여단(일명 88독립보병여단)’으로 개편했다.
이 때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계급을 받고 제1영장에 임명되었다. 이 부대의 한인은 140~180명 정도였다. 이들 가운데 점차 김일성이 부상했다. 최용건(崔庸健)·김책(金策) 등이 선배였지만,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 만주지부 산하의 한인 항일빨치산 그룹은 1930년대 후반 ‘조국광복회’ 등의 대중조직을 형성했다. 이들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방 직후 북한사회에서 ‘통일전선’과 ‘민주기지론’ 전략·전술을 채택하여 결국 북한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김일성 등 항일투쟁 세력이 크게 득세한 반면, 남한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해방 직후 미군정의 임시정부 미승인 정책과 임시정부의 미군정과의 대립, 개인적 역량의 차이, 이승만정권의 성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오히려 친일세력이 득세하였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만주 독립운동 세력과 ‘연변조선족자치주’, 6· 25전쟁 일제가 ‘만주’를 강점하고 1932년 3월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이후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재만한인들의 항일투쟁은 해방 이후 만주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물리치고 그곳을 장악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즉 한인 대중의 중국공산당 등 관련 단체 참가, 항일유격대 및 근거지, 자치조직과 무장투쟁의 경험 등이 중국공산당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던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상황은 해방 후 연변지역에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탄생케 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곧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제기한 ‘민족자치’의 원칙과 그 실현이 한인들의 ‘혁명전통(항일투쟁과 중국공산당 참여)’과 결합되면서 일정한 자치조직을 결실케 한 것이다.
즉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치되고, 다시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과거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고 불렀던 중국 연변지역에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와 같은 핏줄인 조선족 동포의 자치가 실시되고 있는 독특한 지역이다.
중국공산당이 만주를 석권한 직후인 1949년 7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만주의 한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사단 병력 35,100여 명의 병력이 북한인민군 제6·5·12사단으로 개편되어, 6·25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아침 38선을 돌파한 남진 보병 21개 연대 무려 10개 연대가 만주 한인(조선족) 부대였다고 한다. 이들은 광복 직후 주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을 기반으로 중국의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경험을 쌓았으므로 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만주의 한인들은 이처럼 한국현대사에 깊숙이 개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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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신의주 부근 압록강 단교의 모습. 한반도와 만주를 가로지르는 압록강과 현재의 압록강 철교가 만주와 한국현대사의 상관성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
만주지역 독립운동과 한국현대사의 상관성 및 의미 1930년대 초 만주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지청천·김학규 등 일부 인사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민족혁명당이나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등 관내 독립운동의 발전에 공헌했다. 알려져 있듯 우리민족은 ‘8·15해방’ 직전까지도 도처에서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특히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산하 한인들은 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나름대로 ‘항일전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를 타도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으며 한국광복군도 독자적 작전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는 결국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쉽게도 미국과 소련·영국·중국을 비롯한 열강은 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았고, 한국광복군이나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일제와의 항전을 승전국 자격요건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주지역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은 1910년까지 지속되었던 전제군주체제를 청산하고 근대 국민국가의 정체인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 한인 교민들을 기반으로 한 여러 독립운동 조직에서 이를 실천함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만주지역 독립운동은 ‘과거의 기억’으로 점차 잊혀져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온갖 열악한 조건을 무릅쓰고 투쟁했던 선열들의 치열한 몸부림과 그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거대한 ‘국제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오히려 자주와 독립의 소중한 가치,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만주, 즉 중국 동북지방은 우리의 생존과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략지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곳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 미래의 발전전략 및 통일문제 등과 밀접히 연계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이제 만주를 ‘한민족이 잃어버린 고토’가 아니라, 동북아 여러 나라와 민족이 평화롭게 교류하며 어울려 사는 ‘평화와 공존’의 무대로서 새롭게 인식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특히 이곳에는 조선족 동포들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