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과 학교 사이를 오가며 등하굣길의 학생들을 실어나르는 셔틀 통학버스를 이용해 아이의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러가던 날이었다. 명랑하고 풋풋한 중고생들로 가득찬 버스에 모처럼 함께 탄 남편과 나는, 내 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 모두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져 절로 마음이 흐뭇했다.
우리 부부는 학생들이 다 타기를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에 버스에 오른 후 운전사에게 요금을 치르고는 적당한 자리에 서려는데 앞에 앉았던 여학생 둘이가 벌떡 일어나며 냉큼 자리를 양보했다. 생각지 않았던 일이라 얼결에 남편과 나는 그럴 필요없다고 사양한 후 통로에 자리를 잡고 서서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어린 학생들 눈이라지만 내가 아직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받을 나이는 아닌데..' 하는 똑같은 속마음을 품은 채.
그렇게 몇 정거장을 가는데 갑자기 버스가 멈추더니 이번에는 운전사가 벌떡 일어나서 우리가 서 있는 근처에 앉은 학생들을 향해 '빨리 어른들께 자리를 내 드리라' 며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운전사의 말이 떨어지자 조금은 겁먹은 표정으로 양쪽 좌석에 앉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앞 뒤에 앉아있던 아이들까지 동시에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쯤되니 당황하고 겸연쩍어진 건 우리 부부였다.
마치 학생들의 자리를 빼앗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우리 또한 운전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켜준 자리에 어정쩡하게 앉으면서 남편은 적잖이 당황했던지 얼굴까지 살짝 붉어졌다.
"시드니 학생들의 경로사상(?)이 보통이 아닌 걸, 운전을 하는 도중에 차를 세워서까지 별로 늙지도 않은 우리에게 자리 양보를 가르치다니 예절 교육 한번 철저하다"며 남편과 나는 농반 진반 말을 속삭이듯 주고 받았다.
하지만 잠시 후 다음 정거장에서 젊은이 하나가 버스에 올랐을 때 우리의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이번에도 운전사는 좌석에 앉아가던 한 학생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한 후 그 젋은이더러 앉으라고 했다. 젊은이 또한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별 반응없이 비워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백번 양보하여 40대 중반인 우리 부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갓 스물 정도 되보이는 청년한테까지 '경로사상'을 적용했을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면 다른 승객들에게 학생들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제서야 시드니에서는 무임 승차한 처지의 학생들이 요금을 치루고 탄 일반 승객들에게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경우 승차금지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얼마 전의 매스컴 보도가 생각났다. 같은 조치는 버스 운전사에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심지어 폭언과 행패를 부리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학생들의 버릇을 다잡기 위해 취해진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승차금지까지 시키게 된 배경에는 최근 통학생들이 버스에서 담배까지 피우며 이를 저지하는 버스 운전사에게 욕설과 함께 나무토막을 던지며 난동을 부린 사건 때문이라는 후속 기사를 읽은 기억도 떠올랐다. 학생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버스 내에 비치된 소화기를 들고 운전사를 협박하고 버스내 기물 파손까지 했다는 것이다.
뉴사우스 웨일즈 주 정부는 청소년들의 이같은 반사회적 행동과 집단 패거리 의식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사회구성원간의 상호 존중과 책임의식을 분명히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 일환으로 버스에서는 노약자나 임신부에게 반드시 자리를 양보할 것과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일평생 버스 승차를 금지시키겠다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고, 상황 판단과 시행 권한을 버스 운전사에게 부여키로 했다는 것. 학생들의 통학버스 이용과 관련한 새 법령에 따르면 만약 버스에서 비행을 저지를 경우 학생관리명부에 기록되고, 최소 1년간의 근신조치가 내려진다.
타주와는 달리 뉴사우스 웨일즈 주는 초중고등학생들의 통학버스 요금을 보조하고 있다. 주내 66만명의 학생들이 연 5억 호주 달러의 통학비를 면제받고 있는 것. 따라서 행실이 불량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할 경우 무료 통학 기회자체를 박탈시키겠다는 경고인 셈이다.
이후 운전사의 재량에 따라 노약자나 임산부 뿐 아니라 공짜 승객인 학생들은 나이와 성별, 기타 여하한 조건에 관계없이 돈을 내고 타는 승객 모두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원칙을 정한 모양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되짚으며 그다지 편치 않은 마음으로 앉아 가면서 일부 불량한 청소년들로 인해 순진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자발적 선의가 아닌 강요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제한받는 현실이 안타깝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