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육연구사의 자살사건을 놓고 대구시교육청 관내 교원들의 동정 여론이 들끓고 있다. 14일 대구 교육과학연구원 교육자료부 김번남 교육연구사(57)가 대구광역시 북구 북현2동 K아파트 자택에서 오후 5∼6시경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자살했다. 그를 자살로 몰고간 데는 전교조 대구지부의 고발이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이 지역 교육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일파만파의 파장을 부르고 있다.
대구시교육청이 작성한 사고경위서에 따라 사건의 발단을 살펴보면 8일 오후7시20분 대구MBC는 '베껴서 만든 연구 실적물' 제목의 보도를 통해 교육청이 특정인의 저서를 표절해 연구 실적물을 만들어 배포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어 13일 대구시교육청 홈페이지에는 이를 성토하고 대구시교육청의 해명을 촉구하는 전교조 대구지부의 성명서와 보도자료가 올랐다.
김연구사는 이미 4개월전 이 문제로 곤욕을 치룰만큼 치룬 당사자이다. 그는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자살 당일인 14일 오후 3시 전교조 대구지부장을 만나 더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줄 것을 사정했으나 여의치 않자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까지는 김연구사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 일주일간 맞닥뜨린 상황이고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출발점은 7개월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연구사는 지난해 대구동부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사로 재직 중 교육부지정 열린교육 시범 교육청 업무를 담당했고 11월22일 전국의 회원 174명이 참여한 가운데 보고회를 개최했다. 보고회 후에 김연구사는 실제 수업에 활용이 용이한 '포켓용 장학자료'를 교육현장에 보급하고자 열린교육과 관련된 도서들의 좋은 내용을 발췌해 몇몇 교사들의 협조를 얻어 "열린교육을 위한 다양한 학습방법"이란 소책자를 12월10일 발간해 올 1월에 교사들에게 배부해 활용토록 했다.
그 후 전교조측은 교육청이 배포한 장학자료의 내용이 전교조 경기도 지부장인 L씨가 발간한 책 "열린교육을 위한 학습방법 52가지"의 내용을 복제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에 대해 김연구사는 전교조측에 그 경위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으나 저자인 L씨와 이 책을 출판한 H사장은 저작권 침해라며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전교조 대구지부는 대구시교육청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해 시교육청은 이 사안에 대한 감사를 실시했다.
사태가 '동부교육청의 저작물 도용사건'으로 눈덩이처럼 확산되자 이 자료 제작을 주도했던 김연구사로서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와 출판사 사장 등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이 문제를 수습했다. 개인 차원에서 저작권 침해 부분에 대해 2300만원의 손해배상을 하고 언론보도나 더 이상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양해하기로 약속한 각서도 받았다고 한다. 전교조 대구지부에서도 당사자간에 양해된 사항이므로 더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게 교육청측의 설명이다.
시교육청 감사결과는 '사리사욕이나 영리목적이 아니고 고의성은 없으나 저작권 침해라는 물의가 야기됐다'는 판단이 나왔고 이에 따라 김연구사는 징계조치(2월23일 견책)와 함께 3월1일자로 전직 및 전보조치 됐다. 이로써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런데 6월들어 전교조 대구지부가 다시 동부교육청이 저작권 침해를 했다며 언론에 자료를 제공하고 13일 대구시교육청 홈페이지에 보도자료와 성명서를 게재하고 14일 김연구사가 전교조 대구지부를 찾아가 사정했음에도 이를 받아주지 않자 끝내 그가 유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라는 게 교육청측의 분석이다. 김연구사는 14일 오후4시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실을 나와 직장에서 조퇴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극약을 준비해 도착후 문을 잠그고 오후 5시∼6시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 음독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4일 김연구사와 동행했던 한 장학사가 작성한 김연구사와 전교조 대구지부장 L교사와의 다음 대화 내용을 보면 고인은 본인이 저지른 문제로 인해 동부교육청에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데 대해 큰 부담을 느끼고 해결에 집착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김연구사=교육청에서 발간한 자료는 시범 운영 연구 성과물이 아니고 운영보고회 후에 참고자료로 제작한 것이며 이에 대해 당사자간 해결된 사안을 가지고 동부교육청 이름으로 문제삼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L지부장=당사자끼리 보상을 했고 서로 양해가 됐으므로 전교조 대구지부는 약 3개월간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고 시교육청 교육정책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교사들과 교장, 교육위원, 학교운영위원들, 기자들이 남의 책을 베껴 자료로 만든 사실을 알고 있어 전교조 대구지부가 입장이 매우 곤란해 보도토록 했다. 앞으로 시정될 때까지 계속하겠다.
△김연구사=한번 더 보도되면 나는 그 직을 떠나든지 정리할 단계에 왔다. 나 때문에 직장 동료와 상급자에게 너무나 많은 누를 끼치게 되었다.
한편 김연구사의 어이없는 죽음을 두고 교육청과 전교조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영남일보 보도에 따르면 15일 김연철 대구시교육감은 "전교조가 당사자와의 합의도 지키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을 몰아붙이니 양심바른 사람이 그만 주위에 누를 끼치는 것으로 고민하다가 이렇게 된 것아니냐"며 분개했다.
이에 대해 16일 전교조 대구지부는 '대구시교육청 보도자료의 허실'이란 보도자료를 통해 "김연구사의 죽음은 저작물 표절사건에 책임을 져야 할 교육장과 교육감은 책임을 회피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물은 것도 모자라 또 다시 문제가 확산되자 김연구사에게 사건해결의 압력을 넣은 것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전교조 대구지부는 사건경위를 밝힌 교육청의 보도자료가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반박했다. 전교조 대구지부는 교육청과 출판사간의 합의에 함께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소위 교육청이 주장하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는 합의 각서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교조 대구지부는 저자와 출판사가 손해배상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출판사와 전교조 그리고 김연구사간 합의서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전교조 대구지부가 더 이상 문제를 삼지않기로 약속한 사실도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김연구사의 죽음을 놓고 교육청과 전교조 대구지부는 우선 자살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특히 '더이상 문제삼지않기로' 합의했느니 안했느니 하며 엇갈리게 진술하고 있다.
전교조 대구지부의 주장처럼 과연 구조적인 문제가 그를 죽음으로 내 몰았는지 아니면 교육청 주장처럼 비정한 고발을 거듭한 때문이었는지 누구에게서 답을 구할 것인가. 고인은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