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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출간과 쟁점

역사교과서 등의 주류적인 역사서술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 아래 그 '대안교과서' 집필을 목표로 '교과서포럼'이란 단체가 출범한 것은 2005년 1월25일이었다.

모임의 주축은 박효종(윤리교육)ㆍ이영훈(경제사) 서울대 교수와 차상철 충남대 교수(역사학), 전상인 당시 한림대 교수(사회학),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정치사) 등이었다.

이런 인적 구성에서 주목할 대목은 이른바 정통 역사학 전공자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 포럼이 3년여 작업 끝에 23일 내놓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의 집필진 12명 중에서도 역사학 전공자는 없다.

이런 인적구성은 교과서포럼이 시종 비판 대상으로 삼는 정통 역사학계가 포럼을 역공하는 호재로 자주 활용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역사학의 기본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역사를 왈가왈부하려 한다는 것이다.

포럼측은 기존 역사학계가 '도그마'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역사를 다양하게 서술하거나 해석하지 못하고 특정한 사관(史觀)에 끼워 맞추어 역사왜곡까지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근ㆍ현대사가 너무 좌파적 시각에 기울어져 있으며 민족주의에 시종 일관 매몰돼 있다고 주장한다.

교과서포럼이 그 표적으로 거론한 것이 바로 현행 검인정 고교 한국 근ㆍ현대사 교과서 6종이었다. 하지만 이 검인정 교과서들은 정통 역사학계의 주류적인 역사인식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포럼이 지목한 공격대상은 역사학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교과서포럼이 '한국 근ㆍ현대사'라는 제목 앞에 굳이 '대안교과서'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이 이에서 말미암는다.

하지만 대안교과서 편찬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포럼이 그 시안을 2006년 11월30일 학술심포지엄에 부쳤으나, 그 일부 기술에 군사정권과 유신체제를 미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해서 4.19 관련 단체 회원들이 회의장에 들이닥쳐 폭력사태를 빚기도 했다.

이런 진통을 거쳐 나온 대안교과서는 예상대로 곳곳에서 기존 역사서술이나 해석과는 상치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사실(史實)에 관한 기술에서도 기존 역사상식을 뛰어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갑신정변
역사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갑신정변 주역들이) 일본에 의존해 경거망동함으로써 근대화에 필요한 인적 역량만 잃어버렸으며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기만 부추겼다"고 평가한다.

이에 대해 대안교과서는 그 주역인 김옥균이 남긴 '갑신일록'(甲申日錄)을 근거로 급진개화파들이 청(淸)에 대한 조공과 문벌 폐지 등을 시도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근대화를 추구했던 선각자들로 적극 평가되어야 한다"고 기술했다.

△동학농민봉기
동학농민봉기는 급진적인 사회혁명으로 평가되어 '동학농민혁명'이라거나,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으나, 대안교과서는 이런 역사인식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부터 아예 부정한다.

즉, 동학농민군이 봉기하면서 요구했다는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나 횡포한 부호 및 양반 처벌, 노비 문서 소각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는 1940년 오지영(吳知泳)이 출간한 '역사소설 동학사'에 수록된 내용이며 실제 동학군은 이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부정한다. 그들의 봉기는 "유교적인 근왕주의(勤王主義)에 입각하여 서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복고적인 성격이 강하였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었다가 70년대 이후 그들이 추진한 각종 정책을 '광무개혁'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근대적 개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는 연구들이 역사학계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안교과서는 대한제국이 성립한 가장 결정적인 외부 조건으로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임을 들었다. 이런 설명은 광무개혁이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략 시도에 맞선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역사학계 해석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한제국은 국제(國制)를 보아도 국가의 모든 권한을 군주 한 몸에 집중시킨 반면 일반 국민의 정치참여는 완전히 금지한 '전제국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대안교과서는 비판했다.

△식민지시대의 평가
기존 역사학 서술은 일제의 폭압적 지배와 수탈,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과 협력(친일)이라는 구도에 맞춰 이뤄졌다.

대안교과서 또한 그 총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일제의 한국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도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는 말로 다른 평가들을 시도한다.

예컨대 완전한 신분해방은 갑오경장 때 이뤄졌다고 기존 역사학은 기술하지만 대안교과서는 이를 부정하고 1912년 조선총독부 의 '민사령'이라는 법률을 통해 "식민지 한국에서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고, "이로써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던 조선왕조 시대의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식민지 시대와 관련되는 기술에는 적지 않은 파격적 해석들이 존재한다.

기존 역사학은 토지조사사업으로 한국인 상당수가 토지를 빼앗겼다고 적고있지만 대안교과서는 그 결과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토지대장, 지적도, 등기부가 작성"되었으며 "국가가 토지재산에 대한 증명제도를 완비함으로써 토지거래가 활성화하고 토지를 담보로 한 금융이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대안교과서는 "총독부가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국 농민에게 신고를 강요하고,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무신고지가 발생하자 국유지로 몰수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원래부터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조선왕조 시대부터 토지는 사실상의 사유재산이었으며 농민의 소유권 의식도 매우 높았다. 그래서 총독부는 신고라는 간편한 행정 절차를 통해서 전국 토지의 소유자를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총독부가 시도한 임야조사사업에 대해서도 "조선왕조의 임야 정책은 공유(公有)의 명분을 내세워 사유림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임야의 사적 관리주체가 없어 산림이 황폐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총독부의 임야정책은 사적 관리주체를 창출하여 산림녹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건국과 분단, 한국전쟁
분단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특히 미국과 이를 등에 업은 이승만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주류적 역사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좌파 역사학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을 분단체제 시작으로 잡곤 한다. 그러면서 남한의 건국 주체는 친일파로 본다.

하지만 대안교과서는 우선 8월15일은 광복절(1945년)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일(1948년)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각한다.

나아가 단독정부 수립은 스탈린의 지시로 김일성이 먼저 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제헌의회 의원들의 출신으로 볼 때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친일파 출신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받아친다.

건국과정에서 불거진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은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 세력이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좌절시킨 것은 "친일파 청산보다 내부 단결과 반공 태세가 더 급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농지개혁 또한 기존 역사학은 북한이 철저한 데 비해 남한은 그렇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의 그것이 정치ㆍ경제ㆍ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신생 한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는 데 크게 이바지한 반면, 북한의 그것은 "무상이기는 하나 소유권의 분배가 아니라 경작권의 분배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정통설과 미국과 그에 협조한 남한 정치세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수정설 등 두 가지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주장과 관련해 대안교과서는 이 전쟁이 스탈린의 최종승인과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으로 주도면밀하게 시작되었다는 언급으로써 정통설을 더욱 보강했다.

△이승만ㆍ김구ㆍ김일성
대안교과서는 이승만에 대한 기술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해방 이후 4.19 혁명으로 강제 하야할 때까지의 기간 뿐만 아니라 식민지시대 각종 활동상을 다양하게 소개하려 했다. 그만큼 그가 남긴 족적이 크다는 의미다.
한국전쟁 중 그의 주도로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전시작전 통제권의 미국 이양에 대해 기존 역사학에서는 한국의 자주권을 포기한 굴욕으로 평가하지만, 대안교과서는 "공산주의 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그의 비타협적 반공주의가 반대파나 인권을 탄압하는 부작용을 빚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는 것이다.

반면 김구는 출현 빈도가 현저히 낮다. 심지어 김구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라는 기술까지 첨가하기도 했다.

김일성에 대해서는 1937년 6월4일 그가 이끈 소규모 유격부대가 주도한 보천보 전투를 예로 들면서 "이 사건은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민족의 사기를 드높였으며, 김일성이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언급했지만, 북한정권 수립 이후 김일성에 대해서는 뉴라이트 계열의 전형적인 비판들을 매섭게 가했다.

△박정희와 유신정권
박정희의 집권과정을 '군사쿠데타', 10월유신을 '또 한 차례의 정변'으로 규정하면서도 "그는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민족의 사대주의, 자주정신의 결여, 게으름, 명예심의 결여를 증오했으며, 그 결과로 빚어진 민중의 고난과 가난에 근원적으로 분노"했고,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데 소수 엘리트의 지도적 역할을 중시"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런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한국사회에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성장의 잠재력을 최대로 동원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고 "그의 집권기에 한국경제는 고도성장의 이륙을 달성했으며, 사회는 혁명에 가까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고 평가했다.

유신체제는 기존 역사학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이고 대안교과서 또한 이에 대해서는 이견을 표출하지는 않지만 그 배경에는 1968년 이후 남북한에 대한 북한의 공세강화, 닉슨독트린에 따른 1970년 주한미군 철군 계획 발표, 1972년 미-중 국교수립 등과 같은 국내외 여건 변화를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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